아라키 호텔 : 조식
'늦잠도 푹 자고 쉬어야지'하는 마음으로 여행을 가지만, 오히려 여행지에서는 일찍 일어날 때가 많습니다. 기대할 것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소에는 일어나봐야 출근이나 살림, 아니면 권태이기 때문에 그다지 일어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오늘은 다네가시마를 한 바퀴 돈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벌떡 일어났습니다. 혹시나 예약 시간에 늦어서 바이크를 놓칠까봐 그랬나봅니다. 어쨌든 시간이 넉넉했기에 일단호텔 5층에 있는 WAKASA로 조식을 먹으러 갔습니다.
(WAKASA의 아침. 저런 식으로 숙박객의 인원에 맞추어 조식이 차려져 있습니다.)
조식은 뷔페가 아니라 일식입니다. 종업원 분이 안내를 해주시는 것이나, 차려진 밥상(?)의 수로 볼 때, 숙박객에 딱 맞추어 준비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저 사진의 테이블은 어느 4인 가족을 위해 준비된 테이블이겠지요. 물론 저는 딱 일 인분이 차려져 있는 테이블로 안내받아 앉았습니다. 그러니 오믈렛 줄에 서서 앞 사람들 이야기를 엿듣거나 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자리에 앉으면 따뜻한 밥과 미소시루, 차를 가져다 주고, 그거 열심히 먹으면 되더군요.
(조식. 저 팩에 들어있는 것은 낫토입니다.)
조식은 소박하지만 꽤 구성이 다채로워서 맛있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토스트, 베이컨, 스크램블 에그 같은 뻔한 구성이 아니라서 저는 꽤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낫토를 먹어보았어요. 드라마에서 본 대로 휘휘 저어주다가 젓가락으로 쓱 떠서 먹으려고 했는데 쉽지 않더군요. 막 늘어져서 턱에 묻고 테이블에 떨어지고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젓가락질 처음 해본 서양인들이 이런 기분일까요. 아무튼 맛 이전에 그냥 입안에 집어넣는 난이도가 상당했습니다.
든든히 먹고 방으로 내려와 출발 준비를 했습니다. 베트남에서 한낮에 스쿠터를 타고 돌아다니다가 피부를 홀랑 다 태우고 벗겨버린 기억이 있어서 이번엔 대비를 좀 했습니다. 일단 허벅지 방어를 위해 래시가드 하의 위에 반바지를 입었습니다. 얼굴을 가릴 수 있는 '다용도 스카프' (네, 한강변에서 아주머니들이 뒤집어 쓰고 있는 그거요.)도 착용했습니다. 그리고 가고시마 스타일의 길쭉한 수건 (머리에 두르거나해서 땀이 얼굴에 흐르는 걸 막아줌.)도 준비했죠. 팔은 선크림으로 방어하기로 했습니다. 팔이 두 개가 있는데 뭐 누구 안아줄 필요도 없고 적당히 태워도 나쁘지 않겠죠. 작은 백팩에 지도, 간식, 수영복, 수건 따위를 쑤셔넣고 호텔을 나섰습니다.
렌탈 바이크 다네가시마
어제 자전거를 빌렸던 그 가게의 이름은 '렌탈 바이크 다네가시마'입니다. 아라키 호텔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지요. 이 가게 굉장히 추천입니다. 반납할 때 작은 해프닝이 하나 있었는데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아무튼 정확히 9시에 맞춰서 가니 어제의 그 젊은 사장님이 계시더군요. 두 대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는 시커먼 녀석이었는데 '무척 빠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스쿠터를 딱 한 번 타봤기 때문에 '쉬운 걸로 주세요!' 라고 당당히 말했습니다. 그러자 하얗고 파란, 더 귀엽게 생긴 스쿠터를 주셨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국제 면허를 만들어갔습니다. 국제 면허증에는 이 사람이 어떤 종류의 면허를 취득하고 있는지 적혀있는데요, 약간 걱정했던 것이 제가 이륜 면허가 따로 없었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제가 갖고 있는 1종 보통 면허로 125cc 미만의 바이크는 그냥 운행이 가능하지만, 일본은 보다 까다롭게 규정을 적용한다고 들었거든요. 50cc 빌릴 건데 설마 이륜 면허를 요구하려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 부분에 대해서는 따져 묻지 않으시더군요. 왠지 그냥 한국 면허로도 대여를 해주실 듯한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하려면 국제 면허를 만들어 가시는 게 좋겠죠.) 어제처럼 이름과 연락처, 숙박지를 적고 면허증을 복사해드린 뒤 매끄럽게 바이크 대여에 성공했습니다.
바이크 대여료는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가 3,000엔입니다. 다음날까지 예약하면 4,500엔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다음날까지 빌리는 것으로 했습니다. 만약 바이크를 넘어뜨리거나 하는 사고로 손상을 입힐 경우 30,000엔을 보상해야 하고, 사람을 칠 경우 5,000,000엔인가까지 금액을 부담해야 한다는 무시무시한 종이에 서명도 해야 합니다. 당연히 필요한 과정이겠지요. 서류 작업이 끝나면 사장님께서 간단히 레슨도 해주십니다. 시동 거는 법부터 파킹하는 법까지 친절하게 알려주시더군요.
떠나기 전에 사장님에게 스쿠터로 다네가시마 일주는 어떻냐고 여쭤봤습니다. 사장님께서는 고개를 갸웃 하시더니 '여기도 들르고 저기도 들르고, 모든 곳을 하루에 도는 건 무리!'라고 하셨습니다. 다만 '네다섯 군데를 정해놓고 거기서만 정차한다면 가능할 것 같다'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지도를 펼치며 어디가 추천할 만하냐고 여쭤보니 일단 다네가시마니까 우주센터, 그 다음에는 '치쿠라노이와야'가 멋지니 들러보라고 권하시더군요. 대략 어느 길로 갈지 생각을 해둔 뒤에 시동을 걸었습니다. 사장님께서 '재미있게 놀다 오라'며 인사를 해주시더군요.
다네가시마 라이딩 계획
다네가시마는 위 아래로 길쭉한 섬입니다. 자료에 따르면 길이는 약 60km에 가깝다고 하네요. 일단 제 목표는 일주였는데, 코스를 짜다보니 일주라고 하기에는 약간 모자른 코스가 되었습니다. 지도로 설명하는 게 쉬울 것 같아서 지도를 첨부합니다.
(화살표 방향으로 진행했습니다. 제가 들렀던 곳의 위치를 대략 점으로 찍어놓았습니다.)
위 화살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나카타네 초를 교차점으로 삼아서 우주센터와 치쿠라노이와야를 다녀온 뒤, 다시 나카타네 초에서 서북부 해안을 따라 도는 코스입니다. 이 코스에서 놓치는 부분은 섬의 동남부 해안입니다. 동남부에도 시마마항이라거나 가도쿠라 곶 같은 멋진 곳들이 있는 것 같았지만 여기까지 돌기에는 조금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서 포기했습니다.
다네가시마는 사전에 인터넷으로 별 정보를 접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고시마나 야쿠시마는 '너무 찾아보면 재미없겠다' 싶어서 조금 자제했을 정도인데, 다네가시마는 정말 별 정보가 없더군요. 그래서인지 실제로 가보니 발견하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이 글이 다네가시마 여행에 대해 가장 많은 한국어 정보를 담고 있는 포스팅이 되길 바랍니다. 물론 역설적이지만 이걸 다 보고 가시면 별로 재미없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저는 '일주' 자체를 즐긴 편이지, 그때 그때의 스팟에서 충분한 시간 동안 어떤 활동을 한 것은 아닙니다. 이걸 일종의 프리뷰로 받아들이시고, 본인이 원하는 곳을 찾아 원하는 시간을 보내신다면 좋겠네요.
니시노오모테 -> 나카타네 -> 미나미타네 -> 우주센터
일단 첫 목적지는 우주센터입니다. 여기까지 오셨으면 아시겠지만 다네가시마에는 일본의 로켓 발사 기지가 있습니다. 유명 애니메이션인 <초속 5cm>에도 배경으로 등장했던 곳이죠. 바로 그곳에 가는 겁니다. 제가 <초속 5cm>를 감명 깊게 봤냐고요? 아닙니다. 그럼 로켓이나 우주과학에 관심이 있냐고요? 전혀요. 한국어로 안내를 해줘도 못 알아듣는데 일본어로 되어있는 박물관에서 제가 뭘 이해하겠어요? 그러나 그냥 갔습니다. 다네가시마에 왔으니까 그래도 우주센터는 가봐야ㅡ 정도의 기분이었겠지요.
(날씨가 참 맑았습니다.)
사실 목적지 따위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맑은 하늘 아래에서 이국의 섬을 달린다는 그 기분 자체가 좋습니다. 다네가시마는 도로만 잘 닦여 있을 뿐, 대부분의 풍경은 시골입니다. 쭉 뻗은 해안도로를 달리다가, 길이 내륙으로 접어들면 논밭 사이를 달리기도 하고, 또 작은 마을을 지나쳐가기도 합니다. 차량이 거의 없기 때문에 매우 쾌적하게 달릴 수 있습니다. 뒤에서 '자기야 천천히 가'라고 하면서 허리를 꼬옥 안는 그런 거 물론 없기 때문에 멋대로 달립니다. 가고 싶으면 가고 서고 싶으면 섰습니다. 서서 보는 풍경이 그림이라면 달리면서 보는 풍경은 영화겠지요. 옆으로는 바다가, 위로는 구름이, 앞으로는 소실점입니다. 훌륭한 길은 그 자체로 보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카타네 초와 미나미타네 초는 일종의 읍내긴 한데 역시나 조용합니다. 특히 상업 시설은 거의 없어보였습니다. 중간에 간식 같은 것을 좀 먹고 싶었는데 도통 문을 연 가게가 없더군요. 아니 가게 자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간판을 워낙 작게 달아놔서 제가 못 찾았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적당한 데에서 먹자'는 식으로 돌아다니시면 조금 곤란할 것 같습니다. 나름 읍내인 이 두 군데가 그러하니 나머지 길에는 뭐가 있을리가 없습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그냥 갑니다. 핫도그 먹고 싶은데 우주센터에 가면 핫도그 있을까? 뭐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그냥 갑니다.
다네가시마 우주센터
다네가시마 우주센터는 섬의 남동쪽 끄트머리에 있습니다. 표지판이 있긴 하지만 '과연 이런 곳에?' 싶을 정도로 한적해서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달리다보면 나옵니다.
(우주센터의 입구입니다. 로켓 구조물이 보입니다.)
(안에 들어가면 이런 식으로 일본의 우주개발 역사를 공부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일본의 역대 우주인들인 것 같습니다.)
(단순히 박물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공원이 조성되어 있어요.)
(우중간의 언덕 위에 있는 시설이 실제로 로켓을 쏘아 올리는 시설 같아요.)
제가 과학을 잘 모르고 일본어도 읽을 수 없기 때문에 우주센터에서 여러 가지를 보고 듣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어요. 만약 둘 중에 하나라도 능숙한 분이 가신다면 충분히 즐길 만한 공간인 것 같습니다. 제가 가장 즐긴 것은 기념품 가게입니다. 티셔츠, 우주식량, 파일 홀더, 뱃지, 자석, 에코백 등 정말 다양한 종류의 기념품을 팔고 있었어요. 가격대는 조금 비싼 편이지만 '우주'와 '외로움'에 대한 멋진 메시지가 적혀 있는 엽서를 좀 사고 싶더군요. 하지만 결론적으로 저는 '우주아이스크림 딸기맛'을 구입했습니다.^^ (나중에 한국에 와서 먹어봤는데 딸기맛 분유를 블럭으로 뭉쳐 건조시킨 것 같은 맛이었습니다;;) 참고로 이 우주식량은 다네가시마 페리 터미널에서도 구입할 수 있으니 억지로 가진 마세요. 어쨌든 우주의 이미지를 이용한 소품에 관심이 많으신 분은 이 기념품 샵에 가보실 만합니다. 또 주변 풍광도 멋있기 때문에 산책을 하셔도 좋을 것 같아요. 물론 전 그냥 바이크로 쉭 돌아 나왔습니다. 산책하기에는 손이 심심하여...
치쿠라노이와야
우주센터에서 나와 북쪽으로 얼마간을 달리면 하마다 해수욕장으로 빠지는 길이 나옵니다. 치쿠라노이와야는 하마다 해수욕장에 있는 바위 동굴입니다. 바이크샵 아저씨가 '여기는 꼭 가봐요, 난 여기가 제일 멋있더라' 라고 추천했던 포인트입니다.
하마다 해수욕장의 초입에는 작은 식당(펍?)이 있습니다. 간단한 음식과 주류를 파는 것 같았어요. 죄다 일본어기도 하고, 그다지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서 직접 주문해보지는 않았습니다. 뭔가를 중간에 드실 계획이라면 여기를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일 년 내내 영업하는 가게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마다 해수욕장은 백사장이 굉장히 넓습니다. 밀물 때는 물이 들어오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약간 대천 해수욕장(?) 같은 느낌이었어요. 탁 트인 느낌이 시원하더군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는데, 역시 가족이나 연인 위주였습니다. 해수욕장에 한쪽에 아래 사진처럼 치쿠라노이와야가 있습니다.
(저기 저 커다란 바위의 아래에 동굴이 숭숭 뚫려 있습니다.)
(동굴 안으로 이렇게 파도가 들이칩니다.)
'치쿠라노이와야'의 뜻이 '천 명이 앉을 만한 동굴'이라는 것 같아요. 천 명이 앉을 수 있다는 것은 약간 과장 같지만 어쨌든 상당히 넓은 공간이 바위 밑에 있습니다. 동굴이라고 해서 막 습하다거나 이상한 생물들이 있다거나 하지는 않아요. 신혼부부인듯한 생물은 한 쌍 있었습니다만... 아무튼 통풍이 잘 되는지 상당히 쾌적한 느낌이므로 연인과 함께 가신다면 돗자리를 펴놓고 쉬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동굴 안에 메아리치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은밀하게 뽀뽀를 하시는 것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물론 저는 무슨 지질학 전공하는 대학원생처럼 두리번두리번 하면서 동굴 안을 헤집다가 그냥 나왔습니다.
경치가 좋아서 여기서는 사진을 하나 남겨 두고 싶었습니다. 야쿠시마의 타이코이와에서는 소심증 때문에 포기했지만 여기서는 지나가던 일본 부부에게 사진을 부탁드렸습니다. 얼굴은 다 가린 사내가 갑자기 와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니 조금 놀라셨을지도 모르지만, 고맙게도 흔쾌히 찍어주셨어요. 지나가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사진을 남기다니, 조금은 성장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저는 혼자 국밥집에서 소주를 마실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했겠지요. 내년쯤에는 또 어떤 혼자로 성장해 있을까 무척 기대됩니다.^^
오부치메부치노타키
하마다 해수욕장에서 다시 북쪽으로 달려 교차점인 나카타네초에 도착했습니다. 이제부터는 75번 도로를 이용해 북쪽으로 이동하는 계획입니다. 서핑 스팟이라는 가네하마 해안에 가기 전에 들를 만한 곳이 있나 지도를 보다가 '오부치메부치노타키'라는 곳에 가보기로 했습니다. 75번 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올라가다가 중간에 빠지는 길이 있습니다. 표지판이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으실 수 있을 거예요. 비교적 좁고 꼬부라진 길을 꽤나 달려야 합니다.
(길을 잘못 들었나? 걱정하다보면 가끔 저렇게 표지판이 안심을 시켜줍니다.)
(오부치메부치노타키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아쉽지만 수영은 금지 같아요.)
(입구에서 조금만 걸어들어가면 이런 연못과 폭포가 있어요. 아래로 내려가는 것도 가능합니다.)
추정컨대 '오부치'는 '남자 연못', '메부치'는 '여자 연못'이고 '타키'가 '폭포'라는 뜻 같습니다. 두 개의 연못이 폭포로 연결되어 있는 꼴입니다. 안내판은 읽을 수 없었지만, 아마도 '위 연못에선 여성들이 멱을 감고, 아래 연못에선 남성들이 멱을 감아서 오부치메부치노타키랍니다' 라는 설명이 적혀있었을 것 같아요.
사진으로는 분위기가 잘 드러나지 않는데, 풀과 나무로 둘러싸여 있어서 고즈넉하고 은밀한 느낌을 주는 곳이에요. 게다가 제가 방문했을 때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굉장히 인상적인 시간이었습니다. 오부치메부치노타키는 다네가시마에서 그렇게 적극적으로 내세우는 관광 스팟은 아닌 것 같은데 저는 여기를 추천하고 싶어요. 대단한 볼거리는 전혀 없지만 왠지 독특한 기운을 주는 곳이었습니다. 저는 코 찔찔이 시절에 장래희망을 '나무꾼'으로 발표한 적이 있는데 선녀랑 결혼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에 나오는 연못은 아마도 이런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제가 방문했을 때 선녀는 없었습니다. 선녀인 척 목욕을 한다거나(여기 입수 금지입니다.) 누군가의 옷을 훔치는 것 (절도 및 협박입니다.)은 어렵겠지만, 연인과 함께 방문한다면 복고풍으로 두 사람의 이름을 쓴 돌을 연못에 던져 넣는 것 정도는 어떨까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보험금을 노리고 배우자를 연못에 던져 넣으시면 안됩니다.
물가에 앉아 발만 담그고 잠시 선녀를 상상하다가, 이미 선녀가 나의 삶을 지나간 것은 아닌가, 내가 날개옷을 너무 일찍 돌려준 것은 아닌가, 아니다 너는 애초에 날개옷을 훔치지도 못했다, 그런 망상을 하다가 자리를 떴습니다. 선녀와 나무꾼은 구전 동화답게 여러 가지 결말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나무꾼이 혼자 남겨진 결말이 제일 유명한 것 같습니다. (그는 절도범이니 인과응보지만) 서술되지 않은 나무꾼의 남은 인생은 서술된 인생보다 훨씬 긴 것이겠지요. 원한도 신파도 없이 ㅡ 한 문학평론가의 표현을 빌림 ㅡ 다시 달리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습니다.
(소실점에 바다가 있는, 아주 멋진 도로입니다.)
가네하마 해안
다네가시마의 관광 지도에는 서핑 스팟이 표시되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이 가네하마 해안입니다. 섬의 서쪽면에 있으며, 오부치메부치노타키에서 75번 도로를 이용해 북쪽으로 가면 들를 수 있습니다.
(가네하마 해안. 파도가 꽤 들이쳤고, 숙달된 서퍼가 몇 분 있었습니다.)
가네하마 해안은 해수욕을 하기에는 파도가 상당히 커보였지만, 그만큼 서핑을 하기에는 적절해보였습니다. 눈에 띄는 렌탈샵이 있었다면 서핑을 했을 텐데 아쉽습니다. 'EASTCOAST'라는 꽤 큰 레스토랑 겸 숙박 시설이 있었는데, 보드 렌탈 서비스를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만약 서핑을 목적으로 다네가시마에 가신다면 이곳에 묵으시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단, 'EASTCOAST'를 제외한 다른 상업 시설이나 편의 시설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충분히 즐길 만한 곳이었는데 여기서 약간 사고(?)가 일어나서 그러지 못했습니다. 바이크를 뭘 잘못 만졌는지 키를 넣고 시동을 거는 구멍이 잠겨버린 것입니다. 아마도 도난을 방지하기 위한 LOCK 기능이 발동된 것 같은데, 제가 뭘 어쩌다가 이걸 걸어버렸는지 모르겠더군요.;; 열쇠가 들어가야 시동을 걸고, 시동을 걸어야 이동을 하고, 이동을 해야 숙소에도 가고 잠도 자고 한국에도 가고, 한국에 가야 한국말 하는 선녀도 찾을 수 있을 텐데 이거 어쩌나 싶었습니다. 바이크를 들고 갈 수도 없고 버리고 갈 수도 없고 대략 멘붕에 빠졌는데 뭘 어떻게 만지니까 LOCK이 다시 풀리더군요. 너무 감사하는 마음에 금방 시동을 걸고 떠나버렸습니다.^^
기시카자키 등대
기시카자키 등대는 섬의 북쪽 끝에 있습니다. 역시 꼬불길로 빠져서 뭔가 임도(?)에 가까운 길까지 지나면 도착할 수 있습니다. 우측에 보이는 사진이 등대입니다. 현재에도 활용을 하고 있는 등대인지, 상주하는 관리인이 있는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무슨 공무원 같은 차림을 한 두 일본 아저씨가 주변을 둘러보고 계셨는데 곧 차를 타고 어딘가로 사라지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인기척도 없었습니다.
어쨌든 등대 자체보다는 등대 주변으로 조성된 공원에서 바다 전망을 즐기는 곳 같습니다. 등대의 앞쪽으로 다네가시마의 북부 해안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파도가 끊임 없이 밀려오고, 또 부숴지고 하는 것이 예뻤습니다. 80년대의 혼성 듀오인 '한마음'의 '갯바위'라는 노래가 생각나더군요. '나는 나는 갯바위, 당신은, 나를 사랑하는 파도-'로 시작하는 노랫말이 아주 아름다운 곡입니다.
(같이 들을래? 하면서 이어폰 한쪽을 내밀기에 좋은 곳. 그러나 음악은 양쪽 다 끼고 스테레오로 들어야.)
우라타 해수욕장
우라타 해수욕장은 다네가시마에서 가장 주력으로 밀고 있는 해수욕장이라는 느낌입니다. 아마도 니시노오모테에서 가장 가깝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니시노오모테에서 출발해 북쪽으로 달리면 20분 정도면 도착 가능합니다. 저는 물론 남쪽으로 일주해서 왔기 때문에 훨씬 더 긴 시간이 걸렸지요. 우라타에 도착한 것이 오후 5시 조금 전쯤이었습니다. 9시에 출발했으니 약 8시간 동안 섬을 돌아서 온 셈이지요.
(우라타 해수욕장의 입구이자 편의시설. 주변에서는 캠핑도 가능합니다.)
우라타는 요키노나 하마다에 비해서 편리한 해수욕장이라는 인상이었습니다. 사진에 보이는 건물에 화장실, 탈의실, 샤워실, 휴게실, 관리사무소 등이 위치하고 있고, 사진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우측에 작은 매점도 있습니다. 입장하는 방식이 독특한데, 위 건물의 3층(2층이었나?)으로 올라가면 해수욕장으로 나갈 수 있는 구름다리가 있습니다.
(건물을 지나 해수욕장으로 나가는 길.)
구름다리를 지나 다시 계단을 내려가면 그때야 백사장이 나옵니다. 백사장은 앞뒤가 짧아서 하마다보다는 요키노에 가까운 모양이었습니다. '광활하다'라거나 '끝없이 펼쳐진' 이라는 표현보다는 '아담한', '아기자기한' 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아요. 제법 많은 사람들이 해수욕장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서핑이나 다른 수상활동보다는 '물놀이'에 적절한 해수욕장입니다.
아무튼 저도 훌렁훌렁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해수욕을 즐겼습니다. 여기까지 무사히 달렸다는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해는 슬몃슬몃 기울어지고 있었습니다. 바다에 들어가 둥실둥실 떠서 하늘을 보고 있으면 종종 까뮈의 문장이 생각납니다. 까뮈는 태양과 바다를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자신이 죽어 없어진 다음에도 영원히 존재하리라는 사실에 대해 뭔가를 말하려고 애썼습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제가 그 기분을 알 것 같다고 스스로 착각해왔습니다. 가능하다면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이국의 작가보다는, 제 옆에 있는 사람과 같은 기분 속에 있는 것이 좋겠지요. 그러나 어떤 증인도 없는 이런 때에는 별 수 없이 어떤 작가들이나 노래를 주워섬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라타 해수욕장 입구에 서있는 관광 안내판.)
샤워를 하고 출발하기 위해 나왔는데 관광 안내판이 보였습니다. 한국어도 병기되어 있더라고요. 니시노오모테로 가는 길에 들를 만한 곳이 있나 봤는데 '큰 바위 마루코'(이타지키바나)라는 곳이 눈에 띄었습니다. 해가 질 때까지 약간 여유가 있을 것 같아서 저 곳에 가보기로 마음을 먹고 시동을 걸었습니다.
이타지키바나 (큰 바위 '마루코')
이타지키바나는 다네가시마 관광 협회에서 발간한 브로셔에 아예 기재되어 있지 않은 장소입니다. 우라타에 있는 안내판을 보기 전에는 존재도 몰랐지요. 이타지키바나로 가는 길은 무척 혼란스러웠습니다. 바다를 끼고 쭉 가면 되겠지-라고 쉽게 생각했는데 상당히 헷갈리더라고요. '이 길은 마지막으로 차가 지나간 게 언제지?' 싶은 길도 있었고요, 한두번은 길을 가다가 도저히 아닌 느낌에 돌아나온 적도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구글 지도를 참고하여 꾸역꾸역 갔습니다.
(헤매다보니 드디어 민가와 표지판을 발견. 좌측에 보이는 길로 내려가면 이타지키바나입니다.)
가는 길에는 민가가 전혀 없었는데 갑자기 민가 두세 채가 나오더군요. 실제로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곳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인기척은 없었거든요. 굉장히 스산하면서도 로맨틱한 곳이었습니다. 지구가 멸망하는 영화에서 연인들이 마지막으로 해안을 향할 때, 손을 꼭잡고 걷는 길같은 느낌이랄까요? 그런데 공터에 바이크를 세우고 내리는 순간, 저는 진정한 공포를 맛봅니다.
( ?! )
바로 바이크 측면에 상당한 크기의 생채기가 나있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바이크를 넘어뜨린 적도 없고, 어디에 긁힌 느낌도 없었기 때문에 깜짝 놀랐습니다. 도로변에서 풀 같은 것에 스쳤나? 라고 하기에는 생채기가 너무 선명했습니다. 아침에 서명한 계약서가 생각났습니다. 이렇게 흠집이 날 경우 3만엔을 배상해야 한다는 내용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악!!! 3만엔이면... 항공권을 하나 살 만한 돈인데! 악!! 이 얼간이 같은 놈 왜 안전운전을 하지 않았나! 이런 자책을 하던 중 문득 이것이 그 유명한 렌트카 사기? 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더군요. 즉 처음에 흠집을 감추고 슬쩍 대여해준 뒤에 나중에 덮어씌우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이 정도의 상처가 날 만한 일이 없었습니다. 다만 이게 제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려면 아침에 꼼꼼히 사진을 찍어뒀어야 하는데 사실 '우왕 쉽게 빌려주네^^' 하면서 확인을 대충했습니다. 으, 바이크샵 사장님의 친절은 이 모든 것을 위한 큰그림이었나, 이런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이타지키바나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요. 마음을 가라앉혔습니다. 어쩔 수 없다, 3만엔은 3만엔이고, 이 시간까지 망치지는 말자는 마음으로 이타지키바나로 향했습니다. 풀숲을 약간 헤치고 나서니 갑자기 커다란 바위들과 탁 트인 바다가 펼쳐지더군요. 아, 이타지키바나는 정말 멋진 곳이었습니다. 사진은 찍긴 찍었는데 전혀 그 느낌이 담기지 않아서 그냥 올리지 않겠습니다.
이타지키바나는 정말로 '지구가 망하는 것을 감상하고 싶은' 그런 곳이었습니다. 사실 바위와 바다 말고는 이렇다 할 무엇이 전혀 없음에도 묘한 울림이 있었습니다. 어째서 이곳을 적극적으로 홍보하지 않는지 궁금하더군요. 개인적으로는 치쿠라노이와야보다 훨씬 인상적인 곳이었습니다. 워낙에 외딴 곳에 있어서 더 극적인 기분이 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공간 자체보다는 여정이 벅찬 감정을 만들어줬을 수도 있겠지요. 어쨌든 이곳은 너무나 정직하고, 너무나 고독한 곳이었습니다. 해가 지고 있었고, 파도가 들이치고 있었고, 바위는 영원히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보였습니다. 까뮈식으로 말하자면 '엄청나고 말없는 슬픔으로 뒤덮인' 곳이었으며, '슬픔의 얼굴을 가진 이것이 그래도 행복이라고 불리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곳이었어요. 네, 이타지키바나는 다네가시마 일주의 대미를 장식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니시노오모테 복귀. 바이크 반납.
감동은 감동이고 일상의 관성도 그 못지않게 강력한 법. 이타지키바나를 뒤로 하고 바이크에 오르자 다시 '악! 3만엔!' 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달리면서 생각했습니다. 3만엔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아웃렛에서 정장 한 벌을 살 수 있지. 혼술을 10번도 넘게 할 수 있지. 발코니에 잔디매트를 깔고 캠핑 테이블과 의자도 놓을 수 있지. 그 테이블 위에 와인도 한 병 놓을 수 있겠네. 경우에 따라 축의금을 6번도 낼 수 있지. 아니야... 축의금을 내나 바이크 수리비를 내나 돌려받지 못할 것은 마찬가지... 이런 잡념을 떨치려 노력하며 니시노오모테를 향해 속도를 높였습니다. 이타지키바나에서 20분도 안 걸렸던 것 같아요. 6시~7시쯤이었던 것 같은데 저는 일단 바이크 렌탈샵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3만엔을 내든 어쩌든 이 일을 빨리 털어 버려야 여행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바이크샵에 가니 역시 아침의 그 젊은 사장님이 계셨습니다. 예상치 못한 제 등장에 약간 의아한 것 같았지만 역시 아침의 그 선한 미소 그대로였습니다. 미소에 속으면 안된다, 만에 하나 실랑이가 생기면 어떤 전략을 취할 것인가, 복잡한 계산을 하며 저는 사장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저 : 실례지만 질문. 이거 제가? (흠집을 가리키며)
사장님 : (0.1초도 고민 안하시고) 아- 핫핫. 아니에요. 그거 원래 있었음. ^o^
저 : 으하앗. 다행입니다! ^o^
사장님 : 핫핫. 신경 쓰지 마세요. 여행은 즐거우셨나요?
네, 이것이 렌탈 사기일지 모른다는 제 의심은 완전히 박살이 났습니다. 사실 사장님이 '어레? 이거 뭐야. 곤란하네요. 배상액은...' 식으로 나오셨어도 할 말이 없었는데 말이죠. 그는 정직한 사람이었으며, 세상은 아직 살 만한 곳이었습니다. 잠시나마 그를 의심하였던 저는 쓰레기입니다.
원래 대여를 다음 날까지 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저는 그냥 이때 반납하기로 했습니다. 다음 날은 어차피 정오쯤에는 배를 타러 가야해서 어딜 돌아다닐 수도 없을 것 같고, 흠집 문제로 한창 마음을 졸인 터라 이 기회에 그냥 바이크를 치워버리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놀란 건, 저는 부분 환불을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고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사장님께서 그럼 내일치 렌트비를 환불해주시겠다며 먼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4,500엔 중에 1,500엔을 돌려주겠다는 것이지요. 오? 따져보면 제가 내일까지 대여하기로 되있었으니 예약을 못 받으셨을 것이고, 내일 대여가 안된다면 고스란히 손해가 될 수도 있는 것인데 알아서 환불을 해주시다니요. 제가 세상을 너무 썩은 곳으로 보고 장사꾼에 대하여 편견을 갖고 있는 것인가요? 원래 이렇게들 해주시나요? 3만엔을 내기는커녕 도리어 1,500엔을 받아버렸으니 참으로 유쾌하더군요.
제가 여행기를 써야겠다고 가장 선명하게 느낀 순간이 바로 이때입니다. 이 가게가 짱이라는 것, 이 사장님은 정직한 분이라는 것을 증언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여행기를 쓰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사장님께 사진도 부탁드렸지요. 사장님은 '에, 그럴까요? 이런 느낌일까나-' 하면서 포즈까지 취해주셨습니다.
(여기가 바로 '렌탈 바이크 다네가시마'. 여러분 여기서 바이크 빌리세요. 두 번 빌리세요.)
사장님께선 사진을 찍고 난 뒤에 저도 찍어주시겠다며 포즈를 취하라고 하시더군요. 친절도 하셔라. 제 사진은 부끄러우니 생략하지만 어쨌든 이 가게는 최고입니다. 세상은 아직 훈훈해! 사장님께 한국의 인터넷에 이 가게 최고 최고라고 꼭 글을 올리겠다 말씀드리니 '에- 뭐 그렇게까지-^^' 하면서 쑥스럽게 좋아하시더군요. 훗훗.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그와의 약속을 지켰다고 생각하니, 아니 그의 친절에 나름의 보답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집니다. 여러분! 다네가시마에서 바이크를 빌리실 때는 여깁니다 여기!
* 그리고 밤
룰루랄라 즐거운 마음으로 호텔로 돌아갔습니다. 이날 밤은 호텔 밖에서 먹고 마셨는데 이 글이 너무 길어졌으므로 여기서부터는 다음 글에 쓰겠습니다. 꽤나 먹고 마셔버렸기 때문에 이어서 쓰자니 또 언제 업로드를 할 수 있겠냐 싶어서요. 여행을 8월에 다녀왔는데 여행기를 쓰다보니 이미 11월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러다가는 이 여행기를 끝내기 전에 다음 여행을 갈 것 같은 느낌마저 듭니다.;; 아무튼 다음 글은 '다네가시마 둘째 날 외전 - 먹고 마시기 편'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