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 중순 가고시마와 야쿠시마, 다네가시마를 7박 8일간 여행한 이야기를 하는 중입니다. 이 글은 다섯 번째 밤을 다네가시마에서 보내고 일어난 때부터 시작합니다. 이 날은 다네가시마에서 오전을 보내고 페리를 탔습니다. 그리고 저녁은 가고시마에서 보냈습니다.)



다네가시마 총포관

  아라키 호텔에서 일어나 아카오기 온천에 다녀왔습니다. 체크아웃을 하고 짐을 프론트에 맡겨 둔 뒤 동네 탐방을 시작했습니다. 아라키 호텔의 뒤쪽으로 올라가면 몇 군데의 관광 포인트가 있습니다. 딱히 어딘가에 가겠다는 생각이 없어도 동네 분위기 자체가 좋습니다. 술렁술렁 걷다가 저는 먼저 게츠토우세이(?) 라고 부르는 어떤 고택에 가보았습니다. 활쏘기 체험 등을 할 수 있는 것 같았는데 어째서인지 아무도 없어서 그냥 앞문으로 쓱 들어가서 머쓱하게 뒷문으로 쓱 나왔습니다. 

  게츠토우세이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다네가시마 총포관이 있습니다. 다네가시마는 총포 전래지로서 역사적 의의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무려 16세기에 포르투갈 상인에 의해 총포가 전해진 곳이라고 하네요. 그래서 일찍이 총포 제작 기술이 발달해 일본 내에서는 오랜 시간 동안 다네가시마산 총포를 높이 쳐줬다고 합니다. 이 총포관은 총포 전래와 기술 발달의 역사, 기타 다네가시마의 풍습을 접할 수 있는 꽤나 규모 있는 박물관입니다. 입장료는 420엔으로, 게츠토우세이와 세트로 구매하면 550엔이라고 합니다. (게츠토우세이만의 입장료는 200엔이라고 합니다. 어? 입장료가 있는 곳이었군요. 전 몰랐는데 본의 아니게 도둑 입장을 해버린 셈이 됐습니다; 아무도 없었고 30초만에 통과했지만 어쨌든 부끄럽습니다;)


(다네가시마 총포관의 외관. 꽤 멋집니다.)


  내부에서는 총포 전래과정을 자동 인형극(?)으로 만들어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인형극은 인형극인데 사람이 조종하는 게 아니라 100% 기계식입니다. 일본어로 대사가 나와서 하나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포르투갈 상인이 어찌어찌 표류하여, 당시 다네가시마를 통치하던 영주 앞에 나아가, 총을 쏴서 새를 떨어뜨리고, 도움을 받는 대신 총포 기술을 전해주어서 대장간에서 뚱땅뚱땅, 뭐 이런 내용들이 회전식 무대에서 차근차근 펼쳐집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연행자 없이도 굉장히 디테일하게 작동하도록 짜인 그 인형극 기술이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전시물의 양도 상당합니다. 총덕후 여러분이 오시면 매우 즐거우실 것 같습니다. 굉장히 앤틱한 총기가 많이 전시되어 있는데, 개중에는 '이걸 들고 다니면서 쐈다고?' 싶은 무지막지한 것도 많았습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훨씬 더 가볍고 훨씬 더 튼튼하고 훨씬 더 살상력까지 높은 총기가 많이 있겠지요. 약간 소름 끼치는 기술의 발달입니다. 미사일 같은 것에 비하면 개인 화기라는 개념 자체가 귀엽지 않은가, 이런 생각도 들었지만 총알 한 발로도 비극은 충분히 완성되는 것 아닐까요. 여러분. 평화를 추구합시다. 

  살벌한 전시물과 대비되는 대단히 귀여운 서비스가 있습니다. 지역의 초딩들이 큐레이팅을 해주고 있더군요. 데스크에서 신청하면 받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초딩들이 매뉴얼(스크립트?)을 들고 관광객들을 4~5명씩 데리고 다니면서 전시물에 관한 각종 정보를 낭랑하게 읊어줍니다. 인간 녹음기 정도의 퍼포먼스지만 참 귀여웠습니다. 요새 서울에서도 '마을이 학교다'라는 슬로건 하에 학교와 지역사회의 연계가 화두인데 이런 것도 좋은 사례인 것 같습니다. 


  (총포관의 입구에는 이런 관광 안내 책자가 있는데, 이것도 지역 초딩들이 만든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런 방식이 일본에서는 보편적인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면 꼭 야쿠시마의 터미널에서도 지역 초딩들이 만든 관광 지도나 홍보물 따위를 전시해놓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다네가시마에서 들렀던 가게의 벽면에 초딩들이 만든 '동네신문' 같은 것이 붙어있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런 것이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관광객의 입장에서 보자면 뭔가 마을 공동체를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이 생생해서 좋았습니다. 주민 전체로부터 환영받는 기분이랄까요. 또 교육적인 입장에서 보더라도, 단지 '과제'를 내서 '평가 점수'를 받고 끝나는 것보다는 이렇게 실질적인 활용 맥락을 만들어주는 편이 더 많이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학창 시절 냈던 그 수많은 과제들은 다 어디로 갔나요? 그게 논설문이건 그림이건 그냥 선생님의 캐비넷 안에서 한두 해 정도 보관되다가 쓰레기통에나 들어갔겠지요. '글을 써서 동네를 소개한다'와 '글을 써서 동네를 소개(하는 것으로 가정)한다'는 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까.



다네가시마 페리 터미널

  티켓 오픈 시간이 되어 페리 터미널에 갔습니다. 오픈은 11시 30분이었고 저는 11시 20분에 갔는데 이미 사람들이 줄을 꽤 서있더군요. 심지어 창구도 오픈된 상태였습니다.^^ 이곳의 승선 시스템은 가고시마에서 야쿠시마를 갈 때와는 또 조금 달랐습니다. 일단 승선신고서를 작성해서 창구에 내고 운임을 지불하면 티켓을 주는 것은 똑같은데, 번호표도 같이 준다는 것이 약간 다릅니다. 저는 99번 표를 받았습니다. 오픈 시간보다 10분 먼저 간 제 앞에 이미 98명이 있었던 것이지요. 핫핫. 아무튼 창구 직원 분이 승선은 1시부터니 그때 오라고 합니다. 1시가 되면 이 번호표를 갖고 뭘 어떻게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으나 뭐 눈치껏 타면 되겠지, 하고 터미널을 나왔습니다. 점심을 먹으러 가려고요.



이름을 알 수 없는 어제 거기

  다네가시마에서 가장 먼저 식사를 했던 후샤에서 한번 더 식사를 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습니다. 워낙에 분위기가 좋은 곳이니까요. 그런데 날도 더우니 이탈리안보다는 좀 시원한 뭔가가 먹고 싶더라고요. 어제 교자와 가라아게를 먹었던 그 식당(이자카야?)이 생각났습니다. 아카오기 온천 바로 옆에 있는 거기입니다. 거기 벽에 시원해보이는 면요리(?) 같은 것의 홍보 포스터가 붙어있었거든요. 거기서 먹고 아라키에서 짐도 가져오면 되겠다 싶어서 총총 걸어갔습니다.


(그 시원해보이는 면요리. 실제로 시원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일본에서는 저렇게 찍어먹는 라멘은 '츠케멘'이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저건 '냉-츠케멘' 정도가 되겠지요. (뜨거운 츠케멘도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전날의 과식으로 몸이 좀 무거웠는데, 가볍게 후루룩 후루룩 먹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저기 젓가락 밑에 종지 두 개가 보이실 텐데요. 츠케멘을 주문하니 아주머니께서 갑자기 저 종지 두개에 소스를 조금씩 담아서 주시더라고요. 그리고 일본어로 뭐라고 하셨는데 사실 못 알아들었습니다. 먹어보라는 몸짓을 하시더군요. 아하, 찍어먹는 소스가 두 가지니까 둘 중에 고르라는 뜻이었습니다. 한쪽은 고마(참깨) 소스였고, 한쪽은 유자 소스인 것 같은데 잘 모르겠습니다. 고마가 좋아요^^ 하니까 알겠다고 웃으시더라고요. 말이 안 통하는데 난처하다거나 답답하다는 표정도 한번 짓지 않고, 혹은 자기 마음대로 소스를 가져오지 않고 최선을 다해 웃으며 접객을 해주신 아주머니의 친절에 또 한번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기분이 좋아지면? 네, 맥주를 또 마셨습니다. 이제 다네가시마에서 더 이상 무엇을 먹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참 아쉬웠습니다. 혼자 맥주를 마시며 '결혼하면 이런 시간도 그리워질 거야'라고 잠시 생각했지만, 이건 뭐 어디까지나 결혼을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겠지요. 우스운 생각입니다. 과연 그런 날이 올지 점점 자신이 없네요. 



프린세스 와카사

  승선 시각인 1시에 맞춰 페리 터미널에 갔습니다. 터미널은 많은 사람들로 웅성거렸습니다. 1시가 되자 메가폰을 든 아저씨가 나타났습니다. 1번부터 10번까지는 타라고 하시더군요. 이렇게 10명 단위, 또는 20명 단위로 번호를 불러서 탑승을 시켰습니다. 티켓을 끊자마자 무조건 선착순으로 타야 하는 가고시마-야쿠시마 페리보다는 합리적인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99번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짧은 시간을 기다려서 프린세스 와카사에 승선할 수 있었습니다.

(다네가시마와 가고시마를 오가는 '프린세스 와카사'의 선수입니다.)


  프린세스 와카사는 가고시마에서 야쿠시마를 갈 때 탔던 '페리2'보다는 규모가 작아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큰 배입니다. 저는 4시간여 동안 편하게 갈 만한 자리를 탐색했습니다. 푹신한 쇼파가 있는 어떤 방이 보였습니다. 여기다 싶어서 자리를 잡았지요. 이 방의 전면에 있는 텔레비젼에서 유아용 애니메이션을 틀어놓고 있었는데, '뭐 곧 끄겠지'하고 쉽게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건 착각이었습니다. 두 시가 되어서 뱃고동이 울리고 배가 출발하는 데에도 애니메이션은 계속 되었습니다.  음량이 적절했다면 참고 잠을 청했을 텐데 정말 시끄럽더군요. 왠지 점점 집중이 되어서 귀를 후려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슬슬 깨달았죠. 여기에 자리를 잡은 게 실수라는 것을. 여기에 계속 있다가는 앞으로 네 시간 동안 아동용 애니메이션에 고문을 당할 각이었습니다. 과감하게 짐을 챙겨서 방을 나왔습니다. 물론 복도고 홀이고 피난민(?)들로 가득하더군요. 실내에는 두 다리를 뻗을 만한 공간이 없어보여서 실외로 나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배의 측면에 있는 복도에 그냥 주저 앉았습니다. 수평선을 보며 네 시간 동안 가는 것도 괜찮다 싶었습니다. 바닥은 조금 딱딱했지만 인구 밀도가 너무 높은 실내에 비하면 차라리 쾌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잠시 바닷바람을 쐬며 책을 읽었는데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늘이 점점 짧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배의 서편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지요. 해가 굉장히 뜨겁기 때문에 그늘과 그늘이 아닌 곳의 차이는 큽니다. <볼케이노>나 <단테스피크>같은 영화를 보면 용암이 사람들을 위협하는 장면이 있는데 거의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피신했습니다.

  배의 후미에는 벤치에 앉은 사람, 바닥에 드러누운 사람, 벽에 기대있는 사람 등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습니다. 후미는 햇빛으로부터는 자유롭지만, 엔진 소음이 조금 심하고, 구조상 바람이 별로 오지 않기 때문에 덥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어째서인지 커플이 많더군요. 그들의 사랑은 매우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솔직히 눈앞에 두고 보기에는 너무 괴롭기 때문에 그냥 배의 동편으로 갔습니다.

  배의 동편에는 서편보다 많은 사람들이 있더군요. 배의 진행 방향과 태양의 위치를 계산한 현자들입니다. 저도 적당히 자리를 잡고 다리를 뻗었습니다. <우미인초>를 조금 읽었습니다. 그리고 전화기에서 몇 개의 메시지와 전화 번호를 지웠습니다. 이제 돌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뭍에 발을 디딜 때는 떠날 때와는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어차피 잊을 수는 없는 것인데, 몇 개의 디지털 기록을 없애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그래도 그러한 제스처로서 조금 새로운 기분을 느낄 수 있다면 충분하겠지요. 제가 뭘 하든지, 무슨 생각을 하든지 물론 바다는 그냥 그렇게 있었습니다. 바다 앞에서는 추억도 다짐도 그냥 다 농담 같기도 합니다. 




가고시마 돌핀포트

  네 시간여가 지나서 가고시마에 도착했습니다. 저는 첫날에 숙박했던 '그린게스트하우스'에 다시 예약을 해둔 상태였습니다. 게스트하우스에 가기 전에 터미널 근처에 있는 돌핀포트를 구경했습니다. 돌핀포트는 항구를 따라 길게 지어진 몰입니다. 식당과 카페가 다수이며, 약간의 상점이 있습니다. 

(돌핀포트의 안내판. 돌핀포트는 일부러 찾아갈 필요까지는 없지만 지나가다 들러볼 만한 곳입니다.)


  저는 1층 한쪽에 있는 잡화점인 '산도리-즈'에 가보았습니다. 기념품 살 만한 것이 있나 해서요. 굉장히 귀엽고 따뜻한 느낌의 소품이 많아보였습니다. 무엇을 사진 않았는데요, 괜히 이곳이 기억나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가게에 들어섰을 때 배경음악으로 'All You Need is Love'가 나오고 있었는데 왠지 찡했습니다. 우쿨렐레 같은 악기로 굉장히 간소하게 편곡해서 (아마도) 일본의 여성 가수가 부른 버전이었어요. 너무나 적절한 때에 적절한 음악이 갑자기 들려오는, 그런 순간에 해당했습니다. 7000년을 살았다는 나무를 보았으며, 바다를 다섯 시간씩 두번 건넜으며, 산 속에서 해가 뜨는 것을 보았고 갯바위에서 해가 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그게 산토리니건, 카트만두건, 레이캬비크건 아무리 멀리 날아가도 돌아올 자리는 정해져있고 그 자리에선 이 노래가 어김없이 나올 것입니다. 




다시 그린게스트하우스

  두 번째일 뿐이지만 괜히 익숙하더군요. 오늘은 아예 독실을 예약해둔 상태였습니다. 상당히 아담한 방에 매트리스가 깔려 있고 담배를 피운다든지 빨래를 널 수 있는 작은 발코니도 있습니다. 물론 욕실이나 화장실은 공용 공간을 이용해야 하지만 가격대 성능비가 좋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독실이라니, 제가 선택했지만 참 저다운 선택이네요.

  가고시마에 처음 도착한 날 왔을 때는 가벼운 흥분 상태였는데, 지금은 여행이 끝나가서 그런지 쓸쓸한 마음이 컸습니다. 이제는 '돌아가는 길'에 해당하니까요. 문득 '삶이 여행이라면, 돌아가는 길은 몇 살 때부터일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아마 돌아가는 날을 의식할 때부터겠지요. 그것을 의식하지 말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정답이겠지만, 쉽게 떨쳐버릴 수는 없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오늘 밤은 아직 내일이 아니더라'라는 시 구절을 기억하며, 남김없이 먹고 마시리라ㅡ 하는 마음으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숙소를 나섰습니다. 이때는 아직 몰랐습니다. 오늘 밤이 얼마나 훈훈해질지.




와카나

  일단 가고시마니까 '흑돼지 샤브샤브'를 먹으려고 했습니다. 돼지고기의 샤브샤브는 한국에서 좀처럼 구경하기가 어려우니까요. 가고시마에서는 특산 음식답게 여러 가게에서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냥 길을 걷다가 쉽게 발견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다만 혼자 먹을 만한 양을 주문 가능한 집을 찾을 수 있을지 약간 걱정이었습니다. 조금 검색을 해보았는데, 덴몬칸에 있는 '와카나'라는 가게에서 '히토리 샤브샤브'를 판다는 정보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가게는 골목에 숨어 있긴 하지만 크게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저기 안쪽에 불 켜진 흰색 간판이 걸린 곳이 '와카나'입니다. 한자로는 '吾愛人'인 것 같아요.)


 '와카나'는 일본의 드라마나 영화에서 본 것만 같은 주점입니다. 꽤 규모가 있는데, 1층에는 십수 명은 나란히 앉을 법한 큰 다찌가 있고, 몇 개의 테이블이 있습니다. 2층도 있는 것 같았는데 올라가보진 않았습니다. 저는 물론 다찌에 앉았지요. 다찌 앞은 주방인데, 요리사 세 분 정도가 매우 바쁘게 이것저것 요리를 하고 계셨습니다.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느긋하다기보다는 상당히 활기찬 느낌의 가게입니다.


(먼저 '1인 샤브샤브'와 '사츠마아게'를 주문해보았습니다.물론 소주도. )


  1인 샤브샤브는 1500엔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상당히 많은 분이 혼자 이것을 드시고 계셨습니다. 귀여운 1인용 화로와 육수가 담긴 냄비를 주면서, 종업원 분이 일본어랑 영어 중에 뭐가 더 편하냐고 물으시더군요. 영어가 좀 낫다고 하니 영어로 된 '와카나의 샤브샤브 먹는 법' 안내문을 한장 주셨습니다. 이 매뉴얼에 따르면 야채를 먼저 넣고 충분히 우려낸 다음에 고기를 샤브샤브로 즐기라고 하더군요. 물론 따라했습니다. 와, 맛있었습니다. 돼지고기의 샤브샤브가 이렇게 연할 수 있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국물도 굉장히 담백하더군요. 그리고 저 죄없고 따뜻한 두부를 먹는 재미도 쏠쏠했습니다. 소주까지 한 모금 마시니 마치 퇴근 길에 홀로 사치를 즐기는 일본 샐러리맨 같은 기분이 들더군요. 

  사츠마아게도 매우 맛있었습니다. 첫째 날에 소주 바 '사사쿠라'에서 먹은 것보다 더 맛있어서 하나 더 시키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어묵을 튀긴 것일 뿐인데 괜히 끌리더라고요. 그리고 사진에서 조그만 그릇에 담긴 저것은 여주(고야)로 만든 샐러드 같은데, 심지어 기본안주인 저것도 맛있었습니다. 오독오독한 여주에 아삭한 양파, 고소한 드레싱(마요네즈 계열인듯? 잘 모르겠어요.)이 술안주로 너무나 그럴듯했습니다. 먹고 마시다보니 '앗 여기는 분명 맛집이야, 한 가지를 더 먹어보자'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습니다. 그래서 메뉴판을 보면서 좀 고민하다가 토리사시미(닭사시미)를 시켜보기로 했습니다.


(껍질만 바삭하게 익힌 닭의 회입니다. 물론 소주도 한 잔 더.)


  양이 너무 많으면 어쩌나 했는데 역시나 딱 적당한 양으로 나오더라고요. 양파, 실파, 간 생강을 곁들여서 간장 소스에 살짝 찍어서 먹는 것이 이 집의 방식인가봅니다. 닭의 회는 처음이었는데 일단 식감이 '질깃질깃'한 것이 재미있었습니다. 보통 소의 육회는 연한 느낌이잖아요? 그런데 이건 확실히 '고기'의 식감이 느껴졌습니다. 입 안에서 찢어지는 닭의 생살을 느끼고 있자니 제가 야만인이 된 것 같아서 상당히 흡족했습니다. '우왓 이거 맛있어!'할 때의 그 '맛있다'는 아니지만 한번쯤 꼭 먹어볼 만한 음식인 것 같습니다. 일단 저 껍질을 좀 보세요. 하. 소주 한 잔 더.

  이상이 '와카나'에서 먹고 마신 것들입니다. 이외에도 야키토리를 비롯해서 다양한 메뉴가 준비되어 있으니 여럿이서 가도 각자 좋아하는 것을 먹고 마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떤 취향에도 들어맞을 수 있는 인기 만점의 대중 맛집이라는 느낌. 그래서인지 인터넷에 와카나에 대한 정보도 꽤 많은 것 같습니다. 궁금하신 분은 네이버에서 '가고시마 와카나'를 검색해보세요. 



야타이무라 : TAGIRUBA

  팥이 들은 달콤한 하드를 하나 먹으면서 가고시마의 밤거리를 룰루랄라 걸었습니다. 가다가 적당한 곳이 있으면 또 들어가볼까, 이런 생각이었죠. 밤공기가 선선했고, 퇴근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굉장히 활기차보이는 좁은 골목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25개의 소규모 주점이 모여있는 '가고시마 후루사토 야타이무라'였습니다.


 (골목의 입구에 있는 안내판에서 각 점포의 간략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가고시마 안내 팜플렛에도 홍보가 되어 있긴 하지만 일부러 가려는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서울로 치면 동대문 앞 포장마차 같은 느낌이 아닐까 했거든요. 현지인은 별로 없고, 비싸고, 맛도 없는 그런 곳이 아닐까 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발이 닿은 이상 들어가보기로 했습니다.


(가게들이 늘어선 골목 안은 무척 활기차서, 마치 축제 같았습니다.)


 모든 가게가 7~8석만 갖추고 있는 소규포 가게입니다. 골목에도 한두 개씩 테이블을 내어놓고 장사를 하는 집이 많았습니다. 골목에 삼삼오오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들, 어느 가게에 들어갈까 설레며 걷고 있는 사람들, 자기 가게에 들르는 것이 어떻냐고 홍보하는 종업원들 (호객 행위라고 하기엔 가게 앞에 가만히 서서 밝은 미소와 함께 외칠 뿐이라 거부감은 전혀 없었습니다.)로 골목 안은 마치 축제처럼 북적거렸습니다. 갑자기 주정뱅이 동화마을로 워프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는 배도 부르고 하니 사시미를 먹을 생각으로 20번 가게인 'TAGIRUBA'에 들어갔습니다. 안내판에 대표 메뉴 사진이 걸려 있는데, 무슨 생선인지는 읽을 수 없었으나 하여튼 뭔가의 사시미 사진을 걸어놓은 곳이거든요.

  TAGIRUBA의 안쪽에는 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바깥 테이블에 앉았습니다. 건장한 남성 분께서 친절히 맞아주셨는데, 안타깝게도 바깥 테이블에서는 사시미를 서빙 받을 수 없다고 하더군요. 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냥 일어나기도 뭣해서 추천 메뉴를 부탁드렸는데, 아마도 무슨 생선의 머리 조림처럼 보이는 것을 권해주셔서 그걸로 부탁드렸습니다.


(그 뭔가의 머리조림. 소주도 또 한 잔^^ )


  종업원 분께서 제가 한국 사람인 것을 아시고 야타이무라의 한국어판 안내 팜플렛을 주셨습니다. 모든 가게에 대한 간략한 정보가 적혀 있지요. 제가 들어간 TAGIRUBA에서 대표 메뉴로 걸어놓고 있는 사시미는 바로 가고시마의 나가시마 초에서 차를 먹여서 키운 방어회였습니다. 앗? 한여름에 방어? 더 먹고 싶더군요. 그러고보니 이 머리 조림은 어쩌면 방어의 머리 조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호시탐탐 안쪽에 자리가 나길 기다리다가 드디어 옮기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안쪽은 가로세로가 4미터나 되려나 싶은 좁은 공간인데, 전석이 다찌입니다. 다찌에 앉아 방어의 사시미를 부탁드렸습니다. 주방장님이 방어를 좋아하냐고 물으시더군요. 무척 좋아하지만 한국에서는 겨울에만 먹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일본에서도 방어는 겨울이 보통이지만 이건 양식하는 방어라서 지금도 먹을 수 있다고 하시더군요.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때요. 


(으아아)


(으아아아아아아아)


  이 방어는 정말 어메이징하게 맛있었습니다. 제가 막입이라서 그런가요? 여행 버프를 받은 걸까요? 서울에서 겨울에 먹는 대방어 못지 않게 훌륭했습니다. 식감은 약간 연어처럼 부드러운 쪽에 가까웠는데, 굉장히 기름진 감칠맛이 났습니다. 가끔 저는 이 사진을 꺼내보면서 그 맛을 되살려보려고 애쓰곤 합니다. 그만큼 강렬한 맛이었습니다. 가격도 1,000엔 미만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한 접시 더 먹고 싶었지만 이렇게 된 바에 한 가게에 더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 접시만 먹고 나왔습니다.



야타이무라 : 쉬는 시간

  화장실도 다녀오고 담배도 좀 태울 겸 골목 구석에 있는 흡연 공간으로 갔습니다. 흡연 공간이라고 해봐야 사람들의 시선이 잘 안 닿는 아주 으슥한 구석에 재떨이 하나를 갖다 놓았을 뿐입니다. 담배를 태우고 있자니 어딘가의 주방에서 일하는 듯한 복장의 젊은이가 오더군요. 가게 손님도 아닌데 왠지 저에게 힘차게 인사를 하더라고요. 꼭 자기네 가게에 들른 사람이 아니더라도 이 골목에 온 사람은 모두 고객으로 생각하나보다, 참으로 친절한 사람들일세, 라고 생각했습니다. 꽤나 미청년이었던 그는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습니다. 태생이 꼰대인 저는 '주방에서 근무하는 분이 영업중에 담배를 태우러 온 건가? 그건 좀 별론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냐면, 그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리더라고요. 꼭 무슨 도게쟈를 하는 모양새였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앉은 채로 담배를 태우는데, 담배를 피우는 중에도 눈빛이 형형하더라고요. 그 눈빛에는 눈코 뜰 새없는 일의 어떤 여운이 남아있었습니다. 9이닝 완투로 녹초가 된 채 덕아웃에서 연장 등판을 기다리는 선발 투수 같았어요. 네, 그 순간에 저는 뭐랄까 '성실히 일하는 청년의 초상' 을 본 느낌이었습니다. 그의 오른쪽 어깨 위로 '나는 오늘 나를 위해 박카스를 사주었습니다'라고 글자를 띄우면 그대로 박카스 광고가 될 그림이었어요. 이 골목의 활기를 위해, 손님들의 즐거움을 위해 영업 시간 내내 앉지도 못하고 얼마나 수고를 했을지 단번에 짐작이 갔습니다. 담배 좀 태우면 어떻습니까. 저희 집 근처에도 이자카야가 있는데 거기 주방장은 그냥 가게 앞에서 피우더라고요. 근무중에 주방 옷을 입고요. 그것에 비하면 이 골목으로 숨어든 이 청년은 얼마나 예의바릅니까. 캔커피라도 한 개 사주고 싶었습니다. 동시에 나는 지금 서울에서 저 청년만큼 열심히 일하고 있는가, 이런 반성도 했습니다. 



야타이무라 : SAKURAYA

  차방어회, 소주, 청년ㅡ 이것들로부터 가벼운 흥분을 얻은 저는 두 번째 가게를 택해 들어갔습니다. 가게는 야타이무라의 세 개 입구 중 하나인 '사이고문' 바로 옆에 있는 7번 'SAKURAYA'입니다. 이곳은 '긴코만 산 구비오레 고등어회'를 취급한다고 팜플렛에 있었는데 그게 뭔지는 몰랐지만 하여튼 대단해보여서 들어갔습니다. 메뉴판의 사진을 가리키며 이거 부탁드린다고 하니까 뭐라고 뭐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추측하기론 '그건 다 떨어졌지만 다른 어떤 어떤 사시미가 있다' 정도의 말씀인 것 같았어요. 그래서 그럼 그걸로 주세요, 소주도 로꾸로 한 잔 주세요, 했습니다. 누가 들어도 외국인의 일본어로. 

  다찌에는 마음씨 좋아 보이는 중년 남성 한 분과 중년 여성 두 분이 술을 드시고 계셨는데 남성 분이 저에게 말을 거셨습니다. 무려 중국어로 '니 슈 중궈런마?' 하시더라고요. 여기서 제가 '워 슈 한궈런' 했으면 일본인과 한국인이 중국어로 대화를 나누는 동아시아 화합의 장이 열렸을 텐데 아쉽게도 그 생각을 못했습니다. 반사적으로 '와타시와 간고쿠진데스' 해버린 것이지요. 중국어로 대답했으면 상당히 초현실적인 상황이 될 뻔했는데 아깝습니다.ㅎㅎ 아무튼 중년 남성과 그 일행 분들은 꽤 놀라시더군요. 가고시마에는 한국인이 그렇게 흔하진 않은가봅니다. 꽤 호기심이 생기셨는지 여행중이냐, 학생이냐, 일본에는 처음이냐, 등을 물어 오셨습니다. 야쿠시마와 다네가시마를 다녀왔다고 하니 자기도 다네가시마까지는 안가봤다면서 적잖이 놀라시더군요. 제가 기비나고(샛줄멸)의 사시미와 소주를 시켰더니 세 분이 박수를 치면서 오오, 그래 가고시마에서는 그거지, 라고 하시더군요.

(기비나고 사시미와 소주. 가고시마 현지인에게 인정 받은 초이스입니다.)


  여사님이 명동에서 삼겹살 먹은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데 이십대 초중반쯤으로 보이는 일본인 청년 두 명이 들어와 제 옆자리에 앉았습니다. 아까의 남성 분이 어서 오라면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시더군요. 모두 아는 사람인가? 했는데 전부 다 모르는 사람이랍니다. 심지어 그 남성 분과 옆에 여성 두 분도 초면이라고 하더라고요. 주방장 분께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이 이것이 야타이무라의 보통 분위기라고 합니다. 다같이 다찌에 둘러 앉아서 뭐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술과 음식을 즐기다가 헤어지는 것이지요. 참으로 멋지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을 나누는' 일에 있어서는 흔히 우리나라가 더 훈훈하다는 고정관념이 있지만, 솔직히 서울에서의 삶은 개뿔도 그렇지 않잖아요? 생각해보면 한국은 약간 '우리 그룹'끼리는 굉장히 끈끈하되, '낯선 사람'에 대하여는 조금 배타적인 면이 강한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오히려 더 개인적인 사회일수록, 암묵적인 경계선이 더 분명할수록 역설적으로 스스럼없는 스몰토킹이 가능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큐슈 지방 특유의 문화일까요? 어쨌든 저는 이런 식의 가벼운 연대가 매우 반가웠습니다. 자연스럽게 두 청년과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술과 음식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두 청년은 오이타에서 초등학교인지 중학교를 함께 졸업하고 소식이 끊겼다가 이곳 가고시마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다고 합니다. 미소나 쇼유 같은 것을 파는 업체에서 영업을 하고 있다고 해요. 이 '영업'이란 것을 한 친구가 표현하는 방법이 재미있었는데 두 손을 펼쳐서 비비는 시늉을 하더군요. 네, 우리가 흔히 '사바사바'라고 말하는 그거 있잖아요. 한국이나 일본이나 영업맨들의 애환은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외에도 많은 유쾌한 장면이 있었는데 네 달 전이라서 잘 기억이 안나지만 뒤죽박죽인 그대로 묘사를 해보겠습니다. 아래 대화는 몇 잔의 소주, 일본주, 기비나고 사시미, 케이항, 감자튀김 등이 테이블 위를 지나가면서 이루어졌습니다. 


청  년 : 나 소녀시대 좋아함. 빅뱅도 알아. 너도 좋아함?

     : 윽. 30대의 남성은 보통 아이돌에 그다지 흥미 없어.

아  재 : 어, 그럼 한국에서 30대 남성은 보통 뭐에 흥미가 있어?

     : 글쎄, 돈, 차, 집, 결혼, 그런 것들?

아  재 : 과연 그렇네. 일본도 그렇지. 너는 그것들 잘 되고 있니?

     : 나니모 나이!ㅋㅋㅋㅋㅋㅋ

(모두)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건배ㅋㅋㅋㅋㅋㅋㅋ

      

청  년 : 여자친구 있습니까?

    : 없어. 

청  년 : ㅋㅋㅋㅋ 당신 내 나카마ㅋㅋㅋ

    : 나카마가 뭐여?

청  년 : 음... 에... '세임 레베루 히토'ㅋㅋㅋ

    : ㅋㅋㅋㅋㅋㅋㅋ건배ㅋㅋㅋㅋㅋㅋ


여사님 : 일본 여자는 어때?

    : 모두 웃는 얼굴. 야채(야사이). 좋습니다.

여사님 : 뭐?ㅋㅋㅋㅋㅋㅋㅋ

    : 아니 아니, 상냥하다고(야사시이)ㅋㅋㅋㅋㅋ

여사님 : ㅋㅋㅋㅋ오? 일본 여자도 괜찮은 거야? 

    : 저는 좋다. 그런데 일본 여자가 나에게 관심 없어 ㅋㅋㅋ

(모두) : ㅋㅋㅋㅋㅋㅋ건배ㅋㅋㅋㅋㅋ


청  년 : (저를 보며) '다까라'가 영어로 therefore인가?

    : 너 지금 나한테 질문? 나 한국인인데?

아  재 : (청년에게) 바카ㅋㅋㅋ 뭐하는 거야 ㅋㅋㅋ

청  년 : 아 미안ㅋㅋㅋㅋㅋㅋ건배ㅋㅋㅋㅋㅋㅋ


  이렇게 실없이 낄낄대면서 자정 가까이 술을 마셨습니다. 음식도 나눠 먹고, 소주도 추천 받아 마시고, 기념 사진도 찍었지요. 화룡점정은 아재님께서 이 술집에 있던 모든 사람의 술값을 다 계산한 것입니다. 한 2만엔은 넘게 나왔을 것 같은데 쿨하게 계산하셨습니다. 본인은 여기에 있는 26개 주점을 전부 다 가보았는데, 가끔 이렇게 즐거울 때면 계산을 종종 하신다고 합니다. 네, 저는 운 좋게도 야타이무라 터줏대감님을 만난 셈이지요. 청년들은 '오오 카미사마'하면서 절을 올리더군요. 물론 저도 깍듯이 예의를 표했습니다. 맛있는 음식, 더 맛있는 술, 좋은 사람들을 만끽하고도 돈을 한 푼도 내지 않으려니 약간 죄송한 마음까지 들더군요. 가게 문을 닫을 시간이 되어 사장님께도 정말 즐거웠다고 인사를 제대로 드렸습니다. 두 청년과도 가게 앞에서 헤어졌습니다. 




  숙소로 돌아가며 생각했습니다. 여행지에서 보내는 밤이란 건 이럴 수도 있구나, 제가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이 실현된 밤이었습니다. '운명적으로 사랑에 빠지기' 정도를 제외하면 다 이루어진 것 같아요. 그건 너무 초현실적인 바람이니까 뭐 그렇다고 치고, 아직까지 이날 밤을 생각하면 흐뭇한 미소가 지어집니다. 여행지에서 낯선 사람들과 어울려 밤을 보내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은 아니며, 저 역시 게스트하우스 등에서 그런 적이 있긴 하지만 이날은 뭔가 특별했습니다. 비좁은 포장마차, 평범한 남자 사람들, 더듬더듬 외국어, 몇 잔의 소주, 신선한 안주 뭐 이런 것들 하나하나 꼽아보면 그렇게 특별할 것까진 없지만, 이것들이 모두 조화롭게 어우러지니 굉장히 유쾌하더라고요. 

  물론 이날 밤도 역시나 게스트하우스의 독방에서 이불을 추켜올리며 잠든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네 달이 지난 지금 서울에서의 제 삶도 여전히 혼자입니다. 살림살이는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고, 정확히 제자리로 돌아와 토요일 저녁인데 컴퓨터 앞에 앉아서 여행기나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추억은 희망만큼 강력한 것, 이날 먹은 흑돼지 샤브샤브며, 차방어의 사시미며, 시원한 쇼츄의 감각은 아직도 생생하고, 가고시마 사람들의 친절과 환대는 더 생생합니다. 좋은 순간이 한번 있었다면, 그건 다시 있을 수도 있다는 얘기겠지요. 적어도 저는 세상이 가끔 선물처럼 즐거운 밤을 만들어주기도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 점에서 추억과 희망은 한 몸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 가고시마 가세요. 야타이무라 가세요. 혼자여도 괜찮습니다. 제가 해봤어요.

 


     


* 맺음말

  7박 8일의 가고시마 혼자 여행기는 여기서 끝납니다. 귀국하기 전 후쿠오카에서 하룻밤을 더 보냈지만 그다지 감흥은 없었습니다. 후쿠오카는 굉장히 크고 높고 시끄러운 곳이었습니다. 라멘, 호르몬, 말 사시미 등을 먹어치웠고 나카스 강변도 걸었습니다만 그렇게 마음에 다가오지는 않았습니다. 서울과 비슷해서인지, 귀국 하루 전이라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다지 적고 싶은 것이 없고, 또 후쿠오카는 인터넷에 여행기가 가득 가득하므로 그냥 생략하려고 합니다. 

  먹고 살기 바쁘다보니 여행기를 다 쓰기까지 네 달이나 걸렸습니다. 조금 귀찮아져서 대충 넘어가 버린 때도 있고, 어쩌면 조금 과장한 곳도 있을 것입니다. 무엇을 기대하셨든, 얼마만큼의 실망을 하셨든 여기까지 읽어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가고시마, 야쿠시마, 다네가시마는 굉장히 멋진 곳이므로 방문을 적극 권하고 싶습니다. 특히 당신이 혼자 갈 예정이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무척 고독하겠지만 당신이 걱정하는 것보다는 덜 고독하거나, 혹은 당신이 기대하는 것보다 더 고독합니다. 

  저는 이 여행으로 일본과 일본의 섬 여행에 굉장히 좋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번 겨울에는 또 다른 섬들을 찾아가보려고 합니다. 아마미오시마, 도쿠노시마, 오키노에라부, 요론에 모두 발을 딛는 것이 목표입니다. 여행기도 아마 또 쓸 것 같아요. 왜냐하면 또 혼자 갈 거니까. 혼자 가지만, 정말로 혼자만 기억하고도 만족할 정도로 강한 사람은 못 되니까요. 핫핫.








    

   

  

Posted by (운영중지)



(다네가시마를 바이크로 여행한 앞 이야기에 이어서, 이날 밤에 먹고 마신 것들에 대해 쓰겠습니다.)



저녁

  바이크를 반납한 뒤 호텔로 돌아왔습니다. 조식을 제외하면 하루종일 변변찮은 식사도 못했기 때문에 무척 배가 고팠습니다. 전날 호텔 5층에 있는 '비어가든'에서 약간 실망한 터라 오늘은 밖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온천은 내일 아침에 이용하기로 하고 방에서 샤워를 하고 나갔습니다. 이미 해가 져서 밖에 깜깜했습니다. 

  느긋하게 동네를 한 바퀴쯤 돌아보았습니다. 낮에는 문을 열지 않았던 식당과 주점들이 꽤 영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대개는 무엇을 파는 것인지도 짐작할 수 없고, 내부가 들여다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쉽게 결정할 수 없더군요. 체력을 많이 써서 그런지 육지 고기가 먹고 싶었습니다. 호텔 뒤편에 있는 야끼니꾸 집에 들어갔는데 자리가 없답니다. 그래서 다시 나와서 돌다가 흥미로운 가게를 발견했습니다.

  간판에는 빨간 고추 그림과 함께 고기 '육'자가 써있었습니다. 뭔가 매운 고기를 파는 곳인가보다 했습니다. 스마트폰에 있는 글자표와 대조하며 간판에 적힌 가게 이름을 읽어보았습니다. 가게 이름은 '소우르키친'이었죠. 소우르? 소우르! 네, 이 가게의 이름은 '서울키친'이었습니다.



서울키친

(서울키친의 외관. 니시노오모테점이라는 건 다른 데에도 있다는 것일까요?)


  다네가시마에 '서울키친'이라는 이름의 가게가 있다니 굉장히 호기심이 들었습니다. 한국으로 치면 흑산도쯤에 '도쿄키친'이라는 이름의 가게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음식을 먹고 싶다는 생각은 그다지 없었지만 이쯤되면 궁금해서라도 들어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부가 전혀 보이지 않아서 약간 걱정되는 마음도 있었지만 뭐 죽이기야 하겠냐 싶어서 용기를 내어 들어갔습니다. 

  썰렁한 외부와는 달리 내부는 굉장히 활기찬 분위기였습니다. 파티션으로 나누어져 있어서 어떤 손님이 얼마나 있는지는 볼 수 없었으나 소리만으로도 꽤 인기있는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역시 친절하게 맞아주시는 점원분께 혼자라고 하니 역시 파티션으로 가려져 아늑한 방(?)으로 안내해주셨습니다. 신발을 벗고 올라가야 하는 구조입니다. 테이블 하나를 내어주셨는데 불 넣는 곳이 있더군요. 슬슬 감이 왔습니다. 이곳은 한국식 고깃집을 지향하는 곳이었던 것이죠.  

  메뉴를 보니 대표 메뉴가 '기무치 삼굡사루' 세트인 것 같았습니다. 김치 삼겹살 세트! 이 사람들 뭘 좀 아시네, 라는 기분으로 하나 주문을 해보았습니다. 삼겹살 말고 갈비도 있었고, 소고기도 다양한 부위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각종 부위를 조금씩 저렴하게 판다는 점에서는 전형적인 일본 느낌입니다. 그러니까 완전 한국 식당은 아니고 약간 퓨젼 식당인 셈이지요. 소고기도 좀 시켰습니다.  

 

('기무치 삼굡사루' 세트와 소의 어느 부위. 우설이었나? 기억이 잘 안납니다.)


  기무치 삼굡사루 세트에는 삼겹살(냉동인 듯?) 약간과 상추, 고추장, 그리고 김치가 나옵니다. 사진에 있는 것들이 전부입니다. 한국 고깃집처럼 파무침이나 고추나 계란찜이나 찌개나 뭐 이런 거는 전혀 안 나옵니다. 다만 '기름에 담근 마늘'을 갖다 주시는 것이 흥미롭더군요. 종업원 분이 일본어로 '이 마늘을 불에 올려서 드시는 거예요. 김치도 구워드세요^^' 라고 말씀하시는데 잠시 난 누군가 여긴 어딘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본인이 한국에 있는 이자카야에 갔는데 '와사비를 연어에 살짝 올려서 새순이랑 함께 드세요^^'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비슷한 느낌일까요. 재미있었습니다. 참고로 종업원 분은 한국말을 전혀 못하시는 것 같으니 뭔가 의사소통이 잘될 거라는 기대는 하지 마셔요.  

  무척 허기진 상태라 와구와구 맛있게 먹었습니다. 삼겹살이야 뭐 '나도 삼겹살임' 정도의 느낌이었습니다. 고소하고 바삭한 냉삼도, 육질이 살아있는 통생삼도 아니고 뭔가 애매한 맛이었지만 어쨌든 구운 고기입니다. 맛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함께 시킨 소고기들은 정말 맛있었습니다. '으아, 이것이 행복' 정도의 느낌. 고독한 대식가 모드로 흡입했습니다.


   

(왼쪽은 주류 메뉴판, 오른쪽은 추가로 시켜본 무슨 소고기.)


  한국식 퓨전 고깃집답게 한국 주류도 구비하고 있었습니다. 메뉴판을 다 읽진 못했지만 '막코리'와 '챠미스루' 두 개는 확실히 알아볼 수 있겠더군요. 막걸리는 1잔에 250엔, 1병은 무려 1800엔입니다. 참이슬은 1잔에 280엔, 1병은 800엔이네요. 왠지 시켜보고 싶었지만 조금 비싸기도 하고 1차부터 너무 달리면 좋지 않을 것 같아 그냥 참았습니다. 동석한 일본인 친구라도 있었다면 '어이, 오늘은 칸코쿠 스타일로 달려 볼까?' 하면서 마셨을 수도 있었지만 뭐 저 혼자 여기까지 와서 한국술을 마실 이유는 없겠지요. 평소에도 너무 많이 마시고 있으니까요.^^

  고기 세 접시, 맥주 두 잔을 먹고 5천엔 정도를 지불했습니다. 역시 꽤나 먹어버렸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혼자 고깃집에서 고기를 구워본 것이 조금 재미있었습니다. 제가 평소에 혼자 여기저기서 잘 먹고 마시긴 하지만 아직 고깃집에 혼자 가본 적은 없는데 그걸 일본에서 처음 하게 될 줄은 몰랐거든요. 역시 또 한번 레벨-업 한 것 같은 느낌이 흐뭇했습니다. Aㅏ....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이자카야 (아카오기 온천 바로 옆)

  배를 두들기면서 서울키친을 나왔습니다. 배는 불렀지만 이대로 들어가기엔 역시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한 잔 더 하기로 하고 적당한 장소를 찾아보았습니다. 이때는 이미 10시쯤입니다. 아카오기 온천의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가게 하나가 불을 환히 밝혀두고 있었습니다. 밖에서 보니 굉장히 편안하고 서민적인 느낌의 가게더군요. 주저없이 들어갔습니다. 기본적으로 술집이라기보다는 라멘집의 느낌으로, 대표 메뉴는 돈코츠 라멘과 교자였어요. 다만 몇 가지 간단한 안주도 취급하고 있었고 영업도 새벽 1시 정도까지는 하는 것 같더라고요. 맥주는 병만 있었습니다. 맥주 한 병과 교자, 카라아게를 시켰습니다. 


(금방 나온 교자랑 가라아게. 맥주 큰놈 하나까지 더해서 1,000엔쯤이었습니다.)


  배가 부를 대로 불러서 맛이 있을까, 싶었지만 놀랍게도 맛있더군요.^^ 가라아게야 한국의 여러 동네에서도 꽤 흔하게 사먹을 수 있습니다만 저런 교자는 일부러 찾아가지 않으면 먹기가 좀 어렵잖아요?  그래서 그런지 교자가 굉장히 맛있었습니다. 교자를 한 입 베어물고 맥주를 쭉 들이키니 크아, 사람은 먹고 마시는 것만으로 꽤 행복해질 수 있구먼,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라아게도 방금 튀겨낸 것이라 뜨끈뜨끈해서 맛있었습니다. 가격까지 저렴하니 이런 걸 두고 짱짱맨이라고 하는 거겠죠. 

  제가 또 인상깊었던 것은 맥주 잔의 크기입니다. 사진으로는 잘 감이 안 오시겠지만 흔히 한국에서 아재들이 '그라스잔'이라고 부르는 그 잔(=사이다 잔)보다 약간 크기가 작았어요. '으아, 오늘 열받아!' 할 때는 한번에 마실 수 있을 만한 양이고, '후아 오늘도 고생했어'같은 때는 두 번에 나눠 마실 만한 양인데 참 마음에 들더군요. 제가 술집을 연다면 저는 맥주 잔으로 저 사이즈를 쓰겠어요. 잔이 아담해서 그런지 마셔댈 때 죄책감을 좀 덜어주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아요. 

  아무튼 이 곳은 일부러 외식을 하기 위해 오는 곳이라기보다 퇴근하는 길에 슬쩍 들러서 식사도 하고 맥주도 한 잔 마시고 가는 그런 분위기입니다. 집 근처에 이런 가게가 있으면 제 삶은 조금 더 행복해질 것 같아요. 알콜 중독에 빠지지 않을까, 싶지만 어차피 지금도 집에서 마시는데 뭐^^



이름을 알 수 없는 디저트집 (야끼니꾸도 겸업)

  디저트를 먹고 싶어서 아까 맨 처음에 갔다가 만석이라서 돌아 나온 야끼니꾸집에 갔습니다. 야끼니꾸를 디저트로 먹는 것도 꽤 멋지지만 조금 달콤하고 시원한 게 먹고 싶어서 파르페를 주문했습니다. 아까 보니까 이 집에서 독특하게도 이런 디저트류도 팔고 있더라고요. 디저트류는 테이크아웃으로 가져갈 수 있고, 홀에서는 야끼니꾸를 주문할 수 있는 아주 묘한 가게입니다. 

  아무튼 블루베리가 들어간 녀석으로 주문을 했는데 어째서인지 파르페가 아니라 크레페가 나왔습니다. 제가 뭘 잘못 주문했나봐요. 뭐 어떠리, 달고 상큼하면 됐지-라는 마음으로 들고 룰루랄라 나왔습니다. 

(크레페 들고 룰루랄라. 소화도 시킬 겸 동네 한 바퀴 또 걷습니다.)


(최대 번화가라고 해봤자 이 정도 느낌입니다.)


(좌상단 2층에 'Fellows'라는 바가 굉장히 늦게까지 하는 것 같았는데 좀 무서워서 못 들어감.)   


  아무튼 이렇게 동네를 걷다가 굉장히 호기심이 가는 라멘집을 발견했습니다. 배가 너무나 불렀기 때문에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네가시마에서 마지막 밤이라 생각하니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맥주를 너무 마셔서 그런지 속도 좀 차서 뭔가 뜨끈한 국물로 달래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또 들어갔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미친듯이 먹었군요. 



다네가시마 라멘

  제 기억에 가게 이름이 '다네가시마 라멘'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길에 커다랗게 '라멘'이라고 적힌 배너를 세워 놓은 집은 여기가 유일했습니다. 밖에서 살짝 보니 다찌가 있었고 안쪽에서 젊은 부부로 보이는 분이 열심히 조리를 하고 계시더군요. 오호호? 이거 드라마에서 보던 것과 비슷한걸? 이라는 얄팍한 마음으로 입장하였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니 역시나 반갑게 맞아주셨습니다. 카운터에 자리를 권하시더군요. 밖에서는 잘 안보였는데 주방 뒤쪽으로 신발을 벗고 올라가는 넓은 공간이 있었습니다. 젊은이들도 꽤 삼삼오오 마시고 있더군요. 라멘 말고도 몇 종류 취급하는 안주가 있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매우 정감가는 분위기가 '대중주점'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다네가시마 청년들이 조업을 마치고 모여 술잔을 기울이며 '어이, 너 초등학교 때 우리 반이었던 나미꼬 기억해? 걔 이제 도쿄로 간대'. '에? 어째서?' 약간 이런 대화를 할 것 같은 느낌입니다. 

  메뉴판이 일본어라서 역시 읽기가 어려웠습니다. 추천 메뉴를 여쭤보니 시오 돈코츠 라멘을 권하시더군요. 그것과 함께 맥주를 부탁드렸습니다. 네, 속을 달래겠다고 들어가서는 또 마십니다. 마시면서 바로 앞에 있는 주방을 구경합니다. 주방에는 할머님 한 분, 그리고 제 또래의 부부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부부가 아닐 수도 있지만 전 멋대로 부부라고 상상하기로 했습니다. 아무튼 모두가 굉장히 진심으로 일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특히 함께 일하는 부부는 너무나 아름다워 보이더군요. 감히 질투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그래, 저것이 동반자다, 저것이 사랑이다!'라는 감상에 마음대로 빠졌습니다. 저런 분들이 만들어주는 라멘이 맛없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음주 뒤 뜨끈한 국물. 경배하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든 라멘. 이것을 먹으면 저에게도 좋은 기운이 올 것 같았습니다. 라멘 국물은 진하다기보다 무척 담백한 맛으로, 소박하지만 따뜻한 가게 분위기를 닮아 있었습니다. 다 먹을 수 있을까 싶었지만 먹다보니까 다 먹게 되더라고요. 애써 만들어주셨는데 남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물론 맥주도 한 잔 시원하게 비웠습니다. 정말 더 이상은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배가 가득 찼고, 왠지 '하얗게 불태웠어'라는 만화 대사가 생각났습니다. 속풀이까지 확실하게 했으니 이제 돌아가야 할 때가 됐습니다. 만족감 반, 쓸쓸함 반으로 계산을 하고 뒤뚱뒤뚱 호텔로 돌아갔습니다.



  많이 먹었습니다. 배가 고파서 저리 많은 먹은 것만은 아니었겠지요. 오늘은 10시간 가까이 섬 이곳 저곳으로 바이크를 달렸고, 우주 가까이에 갔고, 바다에 뛰어들었으며, 석양을 보았습니다. 고기를 불판에 구웠고, 교자를 쇼유에 찍었고, 맥주를 몇 잔이고 들이켰습니다. 그리고 예쁜 부부가 만드는 라멘도 먹었지요. 그럼에도 채워지지 않는 그것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그 모든 것들로부터 결국은 이방인인 처지 때문이었을까요. 그렇다면 서울에는 '나의 것'이 있을까요. 

  내일은 프린세스 와카사를 타고 바다를 네 시간 동안 건너 가고시마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날 밤에는 TV를 켜 놓은 채로 잠에 들었습니다.







  

   


Posted by (운영중지)




아라키 호텔 : 조식

 '늦잠도 푹 자고 쉬어야지'하는 마음으로 여행을 가지만, 오히려 여행지에서는 일찍 일어날 때가 많습니다. 기대할 것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소에는 일어나봐야 출근이나 살림, 아니면 권태이기 때문에 그다지 일어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오늘은 다네가시마를 한 바퀴 돈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벌떡 일어났습니다. 혹시나 예약 시간에 늦어서 바이크를 놓칠까봐 그랬나봅니다. 어쨌든 시간이 넉넉했기에 일단호텔 5층에 있는 WAKASA로 조식을 먹으러 갔습니다.


(WAKASA의 아침. 저런 식으로 숙박객의 인원에 맞추어 조식이 차려져 있습니다.)


  조식은 뷔페가 아니라 일식입니다. 종업원 분이 안내를 해주시는 것이나, 차려진 밥상(?)의 수로 볼 때, 숙박객에 딱 맞추어 준비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저 사진의 테이블은 어느 4인 가족을 위해 준비된 테이블이겠지요. 물론 저는 딱 일 인분이 차려져 있는 테이블로 안내받아 앉았습니다. 그러니 오믈렛 줄에 서서 앞 사람들 이야기를 엿듣거나 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자리에 앉으면 따뜻한 밥과 미소시루, 차를 가져다 주고, 그거 열심히 먹으면 되더군요. 


(조식. 저 팩에 들어있는 것은 낫토입니다.)


  조식은 소박하지만 꽤 구성이 다채로워서 맛있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토스트, 베이컨, 스크램블 에그 같은 뻔한 구성이 아니라서 저는 꽤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낫토를 먹어보았어요. 드라마에서 본 대로 휘휘 저어주다가 젓가락으로 쓱 떠서 먹으려고 했는데 쉽지 않더군요. 막 늘어져서 턱에 묻고 테이블에 떨어지고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젓가락질 처음 해본 서양인들이 이런 기분일까요. 아무튼 맛 이전에 그냥 입안에 집어넣는 난이도가 상당했습니다.    

  든든히 먹고 방으로 내려와 출발 준비를 했습니다. 베트남에서 한낮에 스쿠터를 타고 돌아다니다가 피부를 홀랑 다 태우고 벗겨버린 기억이 있어서 이번엔 대비를 좀 했습니다. 일단 허벅지 방어를 위해 래시가드 하의 위에 반바지를 입었습니다. 얼굴을 가릴 수 있는 '다용도 스카프' (네, 한강변에서 아주머니들이 뒤집어 쓰고 있는 그거요.)도 착용했습니다. 그리고 가고시마 스타일의 길쭉한 수건 (머리에 두르거나해서 땀이 얼굴에 흐르는 걸 막아줌.)도 준비했죠. 팔은 선크림으로 방어하기로 했습니다. 팔이 두 개가 있는데 뭐 누구 안아줄 필요도 없고 적당히 태워도 나쁘지 않겠죠. 작은 백팩에 지도, 간식, 수영복, 수건 따위를 쑤셔넣고 호텔을 나섰습니다. 



렌탈 바이크 다네가시마

  어제 자전거를 빌렸던 그 가게의 이름은 '렌탈 바이크 다네가시마'입니다. 아라키 호텔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지요. 이 가게 굉장히 추천입니다. 반납할 때 작은 해프닝이 하나 있었는데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아무튼 정확히 9시에 맞춰서 가니 어제의 그 젊은 사장님이 계시더군요. 두 대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는 시커먼 녀석이었는데 '무척 빠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스쿠터를 딱 한 번 타봤기 때문에 '쉬운 걸로 주세요!' 라고 당당히 말했습니다. 그러자 하얗고 파란, 더 귀엽게 생긴 스쿠터를 주셨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국제 면허를 만들어갔습니다. 국제 면허증에는 이 사람이 어떤 종류의 면허를 취득하고 있는지 적혀있는데요, 약간 걱정했던 것이 제가 이륜 면허가 따로 없었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제가 갖고 있는 1종 보통 면허로 125cc 미만의 바이크는 그냥 운행이 가능하지만, 일본은 보다 까다롭게 규정을 적용한다고 들었거든요. 50cc 빌릴 건데 설마 이륜 면허를 요구하려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 부분에 대해서는 따져 묻지 않으시더군요. 왠지 그냥 한국 면허로도 대여를 해주실 듯한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하려면 국제 면허를 만들어 가시는 게 좋겠죠.) 어제처럼 이름과 연락처, 숙박지를 적고 면허증을 복사해드린 뒤 매끄럽게 바이크 대여에 성공했습니다. 

  바이크 대여료는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가 3,000엔입니다. 다음날까지 예약하면 4,500엔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다음날까지 빌리는 것으로 했습니다. 만약 바이크를 넘어뜨리거나 하는 사고로 손상을 입힐 경우 30,000엔을 보상해야 하고, 사람을 칠 경우 5,000,000엔인가까지 금액을 부담해야 한다는 무시무시한 종이에 서명도 해야 합니다. 당연히 필요한 과정이겠지요. 서류 작업이 끝나면 사장님께서 간단히 레슨도 해주십니다. 시동 거는 법부터 파킹하는 법까지 친절하게 알려주시더군요.   

  떠나기 전에 사장님에게 스쿠터로 다네가시마 일주는 어떻냐고 여쭤봤습니다. 사장님께서는 고개를 갸웃 하시더니 '여기도 들르고 저기도 들르고, 모든 곳을 하루에 도는 건 무리!'라고 하셨습니다. 다만 '네다섯 군데를 정해놓고 거기서만 정차한다면 가능할 것 같다'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지도를 펼치며 어디가 추천할 만하냐고 여쭤보니 일단 다네가시마니까 우주센터, 그 다음에는 '치쿠라노이와야'가 멋지니 들러보라고 권하시더군요. 대략 어느 길로 갈지 생각을 해둔 뒤에 시동을 걸었습니다. 사장님께서 '재미있게 놀다 오라'며 인사를 해주시더군요. 



다네가시마 라이딩 계획

  다네가시마는 위 아래로 길쭉한 섬입니다. 자료에 따르면 길이는 약 60km에 가깝다고 하네요. 일단 제 목표는 일주였는데, 코스를 짜다보니 일주라고 하기에는 약간 모자른 코스가 되었습니다. 지도로 설명하는 게 쉬울 것 같아서 지도를 첨부합니다. 



(화살표 방향으로 진행했습니다. 제가 들렀던 곳의 위치를 대략 점으로 찍어놓았습니다.)

 

  위 화살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나카타네 초를 교차점으로 삼아서 우주센터와 치쿠라노이와야를 다녀온 뒤, 다시 나카타네 초에서 서북부 해안을 따라 도는 코스입니다. 이 코스에서 놓치는 부분은 섬의 동남부 해안입니다. 동남부에도 시마마항이라거나 가도쿠라 곶 같은 멋진 곳들이 있는 것 같았지만 여기까지 돌기에는 조금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서 포기했습니다. 

  다네가시마는 사전에 인터넷으로 별 정보를 접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고시마나 야쿠시마는 '너무 찾아보면 재미없겠다' 싶어서 조금 자제했을 정도인데, 다네가시마는 정말 별 정보가 없더군요. 그래서인지 실제로 가보니 발견하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이 글이 다네가시마 여행에 대해 가장 많은 한국어 정보를 담고 있는 포스팅이 되길 바랍니다. 물론 역설적이지만 이걸 다 보고 가시면 별로 재미없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저는 '일주' 자체를 즐긴 편이지, 그때 그때의 스팟에서 충분한 시간 동안 어떤 활동을 한 것은 아닙니다. 이걸 일종의 프리뷰로 받아들이시고, 본인이 원하는 곳을 찾아 원하는 시간을 보내신다면 좋겠네요. 



니시노오모테 -> 나카타네 -> 미나미타네 -> 우주센터

  일단 첫 목적지는 우주센터입니다. 여기까지 오셨으면 아시겠지만 다네가시마에는 일본의 로켓 발사 기지가 있습니다. 유명 애니메이션인 <초속 5cm>에도 배경으로 등장했던 곳이죠. 바로 그곳에 가는 겁니다. 제가 <초속 5cm>를 감명 깊게 봤냐고요? 아닙니다. 그럼 로켓이나 우주과학에 관심이 있냐고요? 전혀요. 한국어로 안내를 해줘도 못 알아듣는데 일본어로 되어있는 박물관에서 제가 뭘 이해하겠어요? 그러나 그냥 갔습니다. 다네가시마에 왔으니까 그래도 우주센터는 가봐야ㅡ 정도의 기분이었겠지요. 


(날씨가 참 맑았습니다.)


  사실 목적지 따위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맑은 하늘 아래에서 이국의 섬을 달린다는 그 기분 자체가 좋습니다. 다네가시마는 도로만 잘 닦여 있을 뿐, 대부분의 풍경은 시골입니다. 쭉 뻗은 해안도로를 달리다가, 길이 내륙으로 접어들면 논밭 사이를 달리기도 하고, 또 작은 마을을 지나쳐가기도 합니다. 차량이 거의 없기 때문에 매우 쾌적하게 달릴 수 있습니다. 뒤에서 '자기야 천천히 가'라고 하면서 허리를 꼬옥 안는 그런 거 물론 없기 때문에 멋대로 달립니다. 가고 싶으면 가고 서고 싶으면 섰습니다. 서서 보는 풍경이 그림이라면 달리면서 보는 풍경은 영화겠지요. 옆으로는 바다가, 위로는 구름이, 앞으로는 소실점입니다. 훌륭한 길은 그 자체로 보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카타네 초와 미나미타네 초는 일종의 읍내긴 한데 역시나 조용합니다. 특히 상업 시설은 거의 없어보였습니다. 중간에 간식 같은 것을 좀 먹고 싶었는데 도통 문을 연 가게가 없더군요. 아니 가게 자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간판을 워낙 작게 달아놔서 제가 못 찾았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적당한 데에서 먹자'는 식으로 돌아다니시면 조금 곤란할 것 같습니다. 나름 읍내인 이 두 군데가 그러하니 나머지 길에는 뭐가 있을리가 없습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그냥 갑니다. 핫도그 먹고 싶은데 우주센터에 가면 핫도그 있을까? 뭐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그냥 갑니다.



다네가시마 우주센터

  다네가시마 우주센터는 섬의 남동쪽 끄트머리에 있습니다. 표지판이 있긴 하지만 '과연 이런 곳에?' 싶을 정도로 한적해서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달리다보면 나옵니다.


(우주센터의 입구입니다. 로켓 구조물이 보입니다.)


(안에 들어가면 이런 식으로 일본의 우주개발 역사를 공부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일본의 역대 우주인들인 것 같습니다.)


(단순히 박물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공원이 조성되어 있어요.)


(우중간의 언덕 위에 있는 시설이 실제로 로켓을 쏘아 올리는 시설 같아요.)


  제가 과학을 잘 모르고 일본어도 읽을 수 없기 때문에 우주센터에서 여러 가지를 보고 듣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어요. 만약 둘 중에 하나라도 능숙한 분이 가신다면 충분히 즐길 만한 공간인 것 같습니다. 제가 가장 즐긴 것은 기념품 가게입니다. 티셔츠, 우주식량, 파일 홀더, 뱃지, 자석, 에코백 등 정말 다양한 종류의 기념품을 팔고 있었어요. 가격대는 조금 비싼 편이지만 '우주'와 '외로움'에 대한 멋진 메시지가 적혀 있는 엽서를 좀 사고 싶더군요. 하지만 결론적으로 저는 '우주아이스크림 딸기맛'을 구입했습니다.^^  (나중에 한국에 와서 먹어봤는데 딸기맛 분유를 블럭으로 뭉쳐 건조시킨 것 같은 맛이었습니다;;) 참고로 이 우주식량은 다네가시마 페리 터미널에서도 구입할 수 있으니 억지로 가진 마세요. 어쨌든 우주의 이미지를 이용한 소품에 관심이 많으신 분은 이 기념품 샵에 가보실 만합니다. 또 주변 풍광도 멋있기 때문에 산책을 하셔도 좋을 것 같아요. 물론 전 그냥 바이크로 쉭 돌아 나왔습니다. 산책하기에는 손이 심심하여...



치쿠라노이와야

  우주센터에서 나와 북쪽으로 얼마간을 달리면 하마다 해수욕장으로 빠지는 길이 나옵니다. 치쿠라노이와야는 하마다 해수욕장에 있는 바위 동굴입니다. 바이크샵 아저씨가 '여기는 꼭 가봐요, 난 여기가 제일 멋있더라' 라고 추천했던 포인트입니다. 

  하마다 해수욕장의 초입에는 작은 식당(펍?)이 있습니다. 간단한 음식과 주류를 파는 것 같았어요. 죄다 일본어기도 하고, 그다지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서 직접 주문해보지는 않았습니다. 뭔가를 중간에 드실 계획이라면 여기를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일 년 내내 영업하는 가게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마다 해수욕장은 백사장이 굉장히 넓습니다. 밀물 때는 물이 들어오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약간 대천 해수욕장(?) 같은 느낌이었어요. 탁 트인 느낌이 시원하더군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는데, 역시 가족이나 연인 위주였습니다. 해수욕장에 한쪽에 아래 사진처럼 치쿠라노이와야가 있습니다.


(저기 저 커다란 바위의 아래에 동굴이 숭숭 뚫려 있습니다.)


(동굴 안으로 이렇게 파도가 들이칩니다.)


  '치쿠라노이와야'의 뜻이 '천 명이 앉을 만한 동굴'이라는 것 같아요. 천 명이 앉을 수 있다는 것은 약간 과장 같지만 어쨌든 상당히 넓은 공간이 바위 밑에 있습니다. 동굴이라고 해서 막 습하다거나 이상한 생물들이 있다거나 하지는 않아요. 신혼부부인듯한 생물은 한 쌍 있었습니다만... 아무튼 통풍이 잘 되는지 상당히 쾌적한 느낌이므로 연인과 함께 가신다면 돗자리를 펴놓고 쉬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동굴 안에 메아리치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은밀하게 뽀뽀를 하시는 것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물론 저는 무슨 지질학 전공하는 대학원생처럼 두리번두리번 하면서 동굴 안을 헤집다가 그냥 나왔습니다. 

  경치가 좋아서 여기서는 사진을 하나 남겨 두고 싶었습니다. 야쿠시마의 타이코이와에서는 소심증 때문에 포기했지만 여기서는 지나가던 일본 부부에게 사진을 부탁드렸습니다. 얼굴은 다 가린 사내가 갑자기 와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니 조금 놀라셨을지도 모르지만, 고맙게도 흔쾌히 찍어주셨어요. 지나가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사진을 남기다니, 조금은 성장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저는 혼자 국밥집에서 소주를 마실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했겠지요. 내년쯤에는 또 어떤 혼자로 성장해 있을까 무척 기대됩니다.^^



오부치메부치노타키

  하마다 해수욕장에서 다시 북쪽으로 달려 교차점인 나카타네초에 도착했습니다. 이제부터는 75번 도로를 이용해 북쪽으로 이동하는 계획입니다. 서핑 스팟이라는 가네하마 해안에 가기 전에 들를 만한 곳이 있나 지도를 보다가 '오부치메부치노타키'라는 곳에 가보기로 했습니다. 75번 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올라가다가 중간에 빠지는 길이 있습니다. 표지판이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으실 수 있을 거예요. 비교적 좁고 꼬부라진 길을 꽤나 달려야 합니다.    















(길을 잘못 들었나? 걱정하다보면 가끔 저렇게 표지판이 안심을 시켜줍니다.

 

(오부치메부치노타키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아쉽지만 수영은 금지 같아요.)


(입구에서 조금만 걸어들어가면 이런 연못과 폭포가 있어요. 아래로 내려가는 것도 가능합니다.) 


  추정컨대 '오부치'는 '남자 연못', '메부치'는 '여자 연못'이고 '타키'가 '폭포'라는 뜻 같습니다. 두 개의 연못이 폭포로 연결되어 있는 꼴입니다. 안내판은 읽을 수 없었지만, 아마도 '위 연못에선 여성들이 멱을 감고, 아래 연못에선 남성들이 멱을 감아서 오부치메부치노타키랍니다' 라는 설명이 적혀있었을 것 같아요. 

  사진으로는 분위기가 잘 드러나지 않는데, 풀과 나무로 둘러싸여 있어서 고즈넉하고 은밀한 느낌을 주는 곳이에요. 게다가 제가 방문했을 때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굉장히 인상적인 시간이었습니다. 오부치메부치노타키는 다네가시마에서 그렇게 적극적으로 내세우는 관광 스팟은 아닌 것 같은데 저는 여기를 추천하고 싶어요. 대단한 볼거리는 전혀 없지만 왠지 독특한 기운을 주는 곳이었습니다. 저는 코 찔찔이 시절에 장래희망을 '나무꾼'으로 발표한 적이 있는데 선녀랑 결혼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에 나오는 연못은 아마도 이런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제가 방문했을 때 선녀는 없었습니다. 선녀인 척 목욕을 한다거나(여기 입수 금지입니다.) 누군가의 옷을 훔치는 것 (절도 및 협박입니다.)은 어렵겠지만, 연인과 함께 방문한다면 복고풍으로 두 사람의 이름을 쓴 돌을 연못에 던져 넣는 것 정도는 어떨까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보험금을 노리고 배우자를 연못에 던져 넣으시면 안됩니다. 

  물가에 앉아 발만 담그고 잠시 선녀를 상상하다가, 이미 선녀가 나의 삶을 지나간 것은 아닌가, 내가 날개옷을 너무 일찍 돌려준 것은 아닌가, 아니다 너는 애초에 날개옷을 훔치지도 못했다, 그런 망상을 하다가 자리를 떴습니다. 선녀와 나무꾼은 구전 동화답게 여러 가지 결말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나무꾼이 혼자 남겨진 결말이 제일 유명한 것 같습니다. (그는 절도범이니 인과응보지만) 서술되지 않은 나무꾼의 남은 인생은 서술된 인생보다 훨씬 긴 것이겠지요. 원한도 신파도 없이 ㅡ 한 문학평론가의 표현을 빌림 ㅡ 다시 달리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습니다. 

(소실점에 바다가 있는, 아주 멋진 도로입니다.)




가네하마 해안

  다네가시마의 관광 지도에는 서핑 스팟이 표시되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이 가네하마 해안입니다. 섬의 서쪽면에 있으며, 오부치메부치노타키에서 75번 도로를 이용해 북쪽으로 가면 들를 수 있습니다. 

(가네하마 해안. 파도가 꽤 들이쳤고, 숙달된 서퍼가 몇 분 있었습니다.)


 가네하마 해안은 해수욕을 하기에는 파도가 상당히 커보였지만, 그만큼 서핑을 하기에는 적절해보였습니다. 눈에 띄는 렌탈샵이 있었다면 서핑을 했을 텐데 아쉽습니다. 'EASTCOAST'라는 꽤 큰 레스토랑 겸 숙박 시설이 있었는데, 보드 렌탈 서비스를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만약 서핑을 목적으로 다네가시마에 가신다면 이곳에 묵으시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단, 'EASTCOAST'를 제외한 다른 상업 시설이나 편의 시설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충분히 즐길 만한 곳이었는데 여기서 약간 사고(?)가 일어나서 그러지 못했습니다. 바이크를 뭘 잘못 만졌는지 키를 넣고 시동을 거는 구멍이 잠겨버린 것입니다. 아마도 도난을 방지하기 위한 LOCK 기능이 발동된 것 같은데, 제가 뭘 어쩌다가 이걸 걸어버렸는지 모르겠더군요.;; 열쇠가 들어가야 시동을 걸고, 시동을 걸어야 이동을 하고, 이동을 해야 숙소에도 가고 잠도 자고 한국에도 가고, 한국에 가야 한국말 하는 선녀도 찾을 수 있을 텐데 이거 어쩌나 싶었습니다. 바이크를 들고 갈 수도 없고 버리고 갈 수도 없고 대략 멘붕에 빠졌는데 뭘 어떻게 만지니까 LOCK이 다시 풀리더군요. 너무 감사하는 마음에 금방 시동을 걸고 떠나버렸습니다.^^




기시카자키 등대

 

 

  기시카자키 등대는 섬의 북쪽 끝에 있습니다. 역시 꼬불길로 빠져서 뭔가 임도(?)에 가까운 길까지 지나면 도착할 수 있습니다. 우측에 보이는 사진이 등대입니다. 현재에도 활용을 하고 있는 등대인지, 상주하는 관리인이 있는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무슨 공무원 같은 차림을 한 두 일본 아저씨가 주변을 둘러보고 계셨는데 곧 차를 타고 어딘가로 사라지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인기척도 없었습니다. 

  어쨌든 등대 자체보다는 등대 주변으로 조성된 공원에서 바다 전망을 즐기는 곳 같습니다. 등대의 앞쪽으로 다네가시마의 북부 해안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파도가 끊임 없이 밀려오고, 또 부숴지고 하는 것이 예뻤습니다. 80년대의 혼성 듀오인 '한마음'의 '갯바위'라는 노래가 생각나더군요. '나는 나는 갯바위, 당신은, 나를 사랑하는 파도-'로 시작하는 노랫말이 아주 아름다운 곡입니다. 

(같이 들을래? 하면서 이어폰 한쪽을 내밀기에 좋은 곳. 그러나 음악은 양쪽 다 끼고 스테레오로 들어야.)



우라타 해수욕장

  우라타 해수욕장은 다네가시마에서 가장 주력으로 밀고 있는 해수욕장이라는 느낌입니다. 아마도 니시노오모테에서 가장 가깝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니시노오모테에서 출발해 북쪽으로 달리면 20분 정도면 도착 가능합니다. 저는 물론 남쪽으로 일주해서 왔기 때문에 훨씬 더 긴 시간이 걸렸지요. 우라타에 도착한 것이 오후 5시 조금 전쯤이었습니다. 9시에 출발했으니 약 8시간 동안 섬을 돌아서 온 셈이지요.


(우라타 해수욕장의 입구이자 편의시설. 주변에서는 캠핑도 가능합니다.)


  우라타는 요키노나 하마다에 비해서 편리한 해수욕장이라는 인상이었습니다. 사진에 보이는 건물에 화장실, 탈의실, 샤워실, 휴게실, 관리사무소 등이 위치하고 있고, 사진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우측에 작은 매점도 있습니다. 입장하는 방식이 독특한데, 위 건물의 3층(2층이었나?)으로 올라가면 해수욕장으로 나갈 수 있는 구름다리가 있습니다. 


  (건물을 지나 해수욕장으로 나가는 길.)


  구름다리를 지나 다시 계단을 내려가면 그때야 백사장이 나옵니다. 백사장은 앞뒤가 짧아서 하마다보다는 요키노에 가까운 모양이었습니다. '광활하다'라거나 '끝없이 펼쳐진' 이라는 표현보다는 '아담한', '아기자기한' 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아요. 제법 많은 사람들이 해수욕장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서핑이나 다른 수상활동보다는 '물놀이'에 적절한 해수욕장입니다. 

  아무튼 저도 훌렁훌렁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해수욕을 즐겼습니다. 여기까지 무사히 달렸다는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해는 슬몃슬몃 기울어지고 있었습니다. 바다에 들어가 둥실둥실 떠서 하늘을 보고 있으면 종종 까뮈의 문장이 생각납니다. 까뮈는 태양과 바다를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자신이 죽어 없어진 다음에도 영원히 존재하리라는 사실에 대해 뭔가를 말하려고 애썼습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제가 그 기분을 알 것 같다고 스스로 착각해왔습니다. 가능하다면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이국의 작가보다는, 제 옆에 있는 사람과 같은 기분 속에 있는 것이 좋겠지요. 그러나 어떤 증인도 없는 이런 때에는 별 수 없이 어떤 작가들이나 노래를 주워섬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라타 해수욕장 입구에 서있는 관광 안내판.)


  샤워를 하고 출발하기 위해 나왔는데 관광 안내판이 보였습니다. 한국어도 병기되어 있더라고요. 니시노오모테로 가는 길에 들를 만한 곳이 있나 봤는데 '큰 바위 마루코'(이타지키바나)라는 곳이 눈에 띄었습니다. 해가 질 때까지 약간 여유가 있을 것 같아서 저 곳에 가보기로 마음을 먹고 시동을 걸었습니다. 



이타지키바나 (큰 바위 '마루코')

  이타지키바나는 다네가시마 관광 협회에서 발간한 브로셔에 아예 기재되어 있지 않은 장소입니다. 우라타에 있는 안내판을 보기 전에는 존재도 몰랐지요. 이타지키바나로 가는 길은 무척 혼란스러웠습니다. 바다를 끼고 쭉 가면 되겠지-라고 쉽게 생각했는데 상당히 헷갈리더라고요. '이 길은 마지막으로 차가 지나간 게 언제지?' 싶은 길도 있었고요, 한두번은 길을 가다가 도저히 아닌 느낌에 돌아나온 적도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구글 지도를 참고하여 꾸역꾸역 갔습니다.


(헤매다보니 드디어 민가와 표지판을 발견. 좌측에 보이는 길로 내려가면 이타지키바나입니다.)


  가는 길에는 민가가 전혀 없었는데 갑자기 민가 두세 채가 나오더군요. 실제로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곳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인기척은 없었거든요. 굉장히 스산하면서도 로맨틱한 곳이었습니다. 지구가 멸망하는 영화에서 연인들이 마지막으로 해안을 향할 때, 손을 꼭잡고 걷는 길같은 느낌이랄까요? 그런데 공터에 바이크를 세우고 내리는 순간, 저는 진정한 공포를 맛봅니다.


( ?! )


  바로 바이크 측면에 상당한 크기의 생채기가 나있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바이크를 넘어뜨린 적도 없고, 어디에 긁힌 느낌도 없었기 때문에 깜짝 놀랐습니다. 도로변에서 풀 같은 것에 스쳤나? 라고 하기에는 생채기가 너무 선명했습니다. 아침에 서명한 계약서가 생각났습니다. 이렇게 흠집이 날 경우 3만엔을 배상해야 한다는 내용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악!!! 3만엔이면... 항공권을 하나 살 만한 돈인데! 악!! 이 얼간이 같은 놈 왜 안전운전을 하지 않았나! 이런 자책을 하던 중 문득 이것이 그 유명한 렌트카 사기? 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더군요. 즉 처음에 흠집을 감추고 슬쩍 대여해준 뒤에 나중에 덮어씌우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이 정도의 상처가 날 만한 일이 없었습니다. 다만 이게 제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려면 아침에 꼼꼼히 사진을 찍어뒀어야 하는데 사실 '우왕 쉽게 빌려주네^^' 하면서 확인을 대충했습니다. 으, 바이크샵 사장님의 친절은 이 모든 것을 위한 큰그림이었나, 이런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이타지키바나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요. 마음을 가라앉혔습니다. 어쩔 수 없다, 3만엔은 3만엔이고, 이 시간까지 망치지는 말자는 마음으로 이타지키바나로 향했습니다. 풀숲을 약간 헤치고 나서니 갑자기 커다란 바위들과 탁 트인 바다가 펼쳐지더군요. 아, 이타지키바나는 정말 멋진 곳이었습니다. 사진은 찍긴 찍었는데 전혀 그 느낌이 담기지 않아서 그냥 올리지 않겠습니다.

  이타지키바나는 정말로 '지구가 망하는 것을 감상하고 싶은' 그런 곳이었습니다. 사실 바위와 바다 말고는 이렇다 할 무엇이 전혀 없음에도 묘한 울림이 있었습니다. 어째서 이곳을 적극적으로 홍보하지 않는지 궁금하더군요. 개인적으로는 치쿠라노이와야보다 훨씬 인상적인 곳이었습니다. 워낙에 외딴 곳에 있어서 더 극적인 기분이 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공간 자체보다는 여정이 벅찬 감정을 만들어줬을 수도 있겠지요. 어쨌든 이곳은 너무나 정직하고, 너무나 고독한 곳이었습니다. 해가 지고 있었고, 파도가 들이치고 있었고, 바위는 영원히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보였습니다. 까뮈식으로 말하자면 '엄청나고 말없는 슬픔으로 뒤덮인' 곳이었으며, '슬픔의 얼굴을 가진 이것이 그래도 행복이라고 불리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곳이었어요. 네, 이타지키바나는 다네가시마 일주의 대미를 장식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니시노오모테 복귀. 바이크 반납.

  감동은 감동이고 일상의 관성도 그 못지않게 강력한 법. 이타지키바나를 뒤로 하고 바이크에 오르자 다시 '악! 3만엔!' 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달리면서 생각했습니다. 3만엔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아웃렛에서 정장 한 벌을 살 수 있지. 혼술을 10번도 넘게 할 수 있지. 발코니에 잔디매트를 깔고 캠핑 테이블과 의자도 놓을 수 있지. 그 테이블 위에 와인도 한 병 놓을 수 있겠네. 경우에 따라 축의금을 6번도 낼 수 있지. 아니야... 축의금을 내나 바이크 수리비를 내나 돌려받지 못할 것은 마찬가지... 이런 잡념을 떨치려 노력하며 니시노오모테를 향해 속도를 높였습니다. 이타지키바나에서 20분도 안 걸렸던 것 같아요. 6시~7시쯤이었던 것 같은데 저는 일단 바이크 렌탈샵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3만엔을 내든 어쩌든 이 일을 빨리 털어 버려야 여행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바이크샵에 가니 역시 아침의 그 젊은 사장님이 계셨습니다. 예상치 못한 제 등장에 약간 의아한 것 같았지만 역시 아침의 그 선한 미소 그대로였습니다. 미소에 속으면 안된다, 만에 하나 실랑이가 생기면 어떤 전략을 취할 것인가, 복잡한 계산을 하며 저는 사장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저   : 실례지만 질문. 이거 제가? (흠집을 가리키며)

사장님 : (0.1초도 고민 안하시고) 아- 핫핫. 아니에요. 그거 원래 있었음. ^o^

   저   : 으하앗. 다행입니다! ^o^

사장님 : 핫핫. 신경 쓰지 마세요. 여행은 즐거우셨나요?


  네, 이것이 렌탈 사기일지 모른다는 제 의심은 완전히 박살이 났습니다. 사실 사장님이 '어레? 이거 뭐야. 곤란하네요. 배상액은...' 식으로 나오셨어도 할 말이 없었는데 말이죠. 그는 정직한 사람이었으며, 세상은 아직 살 만한 곳이었습니다. 잠시나마 그를 의심하였던 저는 쓰레기입니다. 

  원래 대여를 다음 날까지 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저는 그냥 이때 반납하기로 했습니다. 다음 날은 어차피 정오쯤에는 배를 타러 가야해서 어딜 돌아다닐 수도 없을 것 같고, 흠집 문제로 한창 마음을 졸인 터라 이 기회에 그냥 바이크를 치워버리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놀란 건, 저는 부분 환불을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고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사장님께서 그럼 내일치 렌트비를 환불해주시겠다며 먼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4,500엔 중에 1,500엔을 돌려주겠다는 것이지요. 오? 따져보면 제가 내일까지 대여하기로 되있었으니 예약을 못 받으셨을 것이고, 내일 대여가 안된다면 고스란히 손해가 될 수도 있는 것인데 알아서 환불을 해주시다니요. 제가 세상을 너무 썩은 곳으로 보고 장사꾼에 대하여 편견을 갖고 있는 것인가요? 원래 이렇게들 해주시나요?  3만엔을 내기는커녕 도리어 1,500엔을 받아버렸으니 참으로 유쾌하더군요. 

  제가 여행기를 써야겠다고 가장 선명하게 느낀 순간이 바로 이때입니다. 이 가게가 짱이라는 것, 이 사장님은 정직한 분이라는 것을 증언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여행기를 쓰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사장님께 사진도 부탁드렸지요. 사장님은 '에, 그럴까요? 이런 느낌일까나-' 하면서 포즈까지 취해주셨습니다.


(여기가 바로 '렌탈 바이크 다네가시마'. 여러분 여기서 바이크 빌리세요. 두 번 빌리세요.) 


  사장님께선 사진을 찍고 난 뒤에 저도 찍어주시겠다며 포즈를 취하라고 하시더군요. 친절도 하셔라. 제 사진은 부끄러우니 생략하지만 어쨌든 이 가게는 최고입니다. 세상은 아직 훈훈해! 사장님께 한국의 인터넷에 이 가게 최고 최고라고 꼭 글을 올리겠다 말씀드리니 '에- 뭐 그렇게까지-^^' 하면서 쑥스럽게 좋아하시더군요. 훗훗.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그와의 약속을 지켰다고 생각하니, 아니 그의 친절에 나름의 보답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집니다. 여러분! 다네가시마에서 바이크를 빌리실 때는 여깁니다 여기!



* 그리고 밤

  룰루랄라 즐거운 마음으로 호텔로 돌아갔습니다. 이날 밤은 호텔 밖에서 먹고 마셨는데 이 글이 너무 길어졌으므로 여기서부터는 다음 글에 쓰겠습니다. 꽤나 먹고 마셔버렸기 때문에 이어서 쓰자니 또 언제 업로드를 할 수 있겠냐 싶어서요. 여행을 8월에 다녀왔는데 여행기를 쓰다보니 이미 11월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러다가는 이 여행기를 끝내기 전에 다음 여행을 갈 것 같은 느낌마저 듭니다.;; 아무튼 다음 글은 '다네가시마 둘째 날 외전 - 먹고 마시기 편' 입니다. 






  

 

Posted by (운영중지)



야쿠시마에서 다네가시마로

  오늘은 다네가시마로 이동해야 합니다. 저는 오전 9시에 출항하는 '페리 타이요'를 타려는 계획이었습니다. 센노이에의 직원 분께서 항구까지 차로 데려다주겠다고 하시더군요. 끝까지 친절하십니다. 그리고 주인 할아버지(?)께서 도로변까지 나와서 배웅을 해주시는데 약간 황송할 정도였습니다. 아무튼 덕분에 항구까지 편하게 이동했습니다. 짐까지 내려주시는 직원 분께 지난 이틀 동안의 친절에 대하여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었는데 일본어가 짧아서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인터넷에 센노이에를 소개하는 것으로나마 보답이 되길 바랍니다. 


(한적한 미야노우라 항.)


  페리 터미널에 가니 이미 승선중이었습니다. 역시 승선 신고서를 써서 창구로 가야합니다. 표값은 1,440엔입니다. 배는 상당히 아담한 페리였습니다. 가고시마에서 탔던 사쿠라지마 페리와 비슷한 크기가 아닌가 합니다. 승객도 거의 없더군요. 1층 좌식 객실에는 현지인으로 보이는 가족이 하나 있었고, 2층에 가니 약간 무서워보이는 서양 백팩커 형님이 혼자 널부러져 계셨습니다. 어디에 앉을까 어슬렁거리고 있자니 아까 터미널에서 근무하시던 아저씨가 오셔서 제게 말을 걸었습니다. 일본 드라마에 나오는 술꾼 아버지처럼 거친 인상이셔서 약간 긴장했습니다. 

 

  아저씨 : 이 배 시마마로 갑니다. 거긴 no traffic인데 괜찮습니까?

    저   :  에? 다네가시마로 가는 게 아니에요?

  아저씨 : 다네가시마는 맞는데 시마마로 갑니다. 거기 no traffic 임^^.


  아저씨가 저를 다시 터미널로 데려가셨습니다. 그리고 지도를 보여주시더군요. 알고 보니 '페리 타이요'는 제가 숙소를 예약한 '니시노오모테항'이 아니라 그로부터 남쪽으로 상-당히 떨어져 있는 '시마마항'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자동차로 한 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였죠. 저는 짧은 일본어로 그에게 물었습니다.


     저   : 시마마에 버스 없습니까?

   아저씨 : 에- 버스 없습니다. 어떻게든 OO까지 가면 버스가 있을 것 같긴 합니다.

     저   : 택시는 어떻습니까? OO까지.

   아저씨 : 글쎄요. 1만엔은 나올 것 같은데...

     저    : 으헉, 1만엔?

   아저씨 : 니시노오모테로 가려면 고속선을 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티켓 캔스루?^^


  일단 시마마에 가서 어떻게든 부딪혀 볼까 잠시 고민했습니다만 역시 저답게 그냥 티켓을 캔스루-했습니다. 아저씨께서 직접 창구 직원에게 '어이- 이거 캔스루-' 해주셔서 깔끔하게 환불이 됐습니다. 만약 이 아저씨께서 굳이 저에게 말을 걸어서 가르쳐주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 무더위 속에 배낭을 메고 시마마에서 헤맸겠죠? 그 편도 나름 당황스럽고 재미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의 친절에 감사했습니다. 센노이에도 그렇고 터미널 아저씨도 그렇고 제가 만난 야쿠시마 사람들은 어찌 이리 다 친절한지!

  페리 터미널 바로 옆에 있는 고속선 터미널로 갔습니다. 낡은 페리 터미널과는 달리 상당히 쾌적한 느낌이었습니다. 다행히 10시에 다네가시마로 출발하는 고속선 표가 있더군요. 3,800엔이었습니다. 구매 영수증(?)을 승선 15분 전엔가 승선권으로 교환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여기서 예약도 가능하다길래 다네가시마에서 가고시마로 돌아갈 고속선 표를 사두려고 했는데 그건 매진이랍니다. 돌아올 수단을 확보하지 못한 채로 다네가시마에 가게 된 셈입니다. 제때 가고시마 시로 돌아가지 못하면 신칸센을 못탈 것이고, 신칸센을 못타면 비행기를 놓칠 것이고, 비행기를 놓치면 한국에 못 돌아오고, 한국에 못 돌아오면... 한국에 못 돌아가도 별로 신경 쓸 사람이 없을 것 같더라고요.^^ 뭐 무너질 가정이라도 있습니까 제가. 그래서 일단 다네가시마로 가서 어떻게든 찾아보자는 생각으로 배에 올랐습니다.

  고속선은 페리와 달리 지정좌석제입니다. KTX좌석 같은 느낌이더군요. 무척 편했지만, 페리처럼 갑판에 나가서 바다를 보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이런 느낌으로 약 50분을 달리면 다네가시마에 도착합니다.)


  어째서인지 정원의 1/10도 탑승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야쿠시마에서 다네가시마로 이동하는 사람은 그다지 없나봅니다. 객실에 있는 TV에서 중계해주는 리우 올림픽 수영 경기도 보고, 책도 조금 읽다보니 금방 도착했습니다. 너무 금방 도착해서 아쉬울 정도였습니다. 실내였지만 바다 위를 달리는 느낌이 상쾌했거든요. 승무원 분도 무척 친절하고 아름다우셨습니다. (그래서 더 있고 싶었던 것은 아닙니...)


니시노오모테 항

  다네가시마의 니시노오모테 항에 내려서 가장 먼저 가고시마로 돌아갈 배 편을 알아보았습니다. 즐기기도 전에 돌아갈 방법부터 구하고 있자니 너무나 저답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는 멀리 가고 싶은 사람이지만 돌아올 수 있을 만큼만 멀리 가고 싶은 사람이었습니다. 어쨌든 제 삶은 한국에 있는 것이고 그 삶은 꽤 많은 노력으로 얻은 것이니까 흠을 내기 아까운 것이겠지요. 소시민의 자기 보존 관성이라고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돌아가야 한다는 뻔한 사실을 외면할 수 없다면 애초에 확실히 돌아갈 수 있도록 해두는 게 좋겠죠. 더 어렸을 때에는 제가 저인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서 객기도 부렸던 것 같지만 이제 그냥 저인 채로 최대한 행복해지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혹시나 해서 다네가시마의 고속선 터미널에 가서 다시 문의했는데 역시 매진이라고 합니다. 페리가 있으니 그쪽을 알아보라고 권해주시더군요. 페리 터미널은 고속선 터미널 바로 옆에 있었습니다. 다행히 '프린세스 와카사'라고 하는 페리가 하루에 한번 운행하고 있더군요.  

(다네가시마와 가고시마를 오가는 '프린세스 와카사'의 시간표와 운임.)


  다네가시마에서 오후 2시에 출발해서 가고시마에 5시 30분에 도착하는 페리입니다. 스탠다드 좌석을 선택하면 편도 가격이 3,900엔입니다. 창구 직원분께 여쭤보니 예약 개념은 없고 당일 11시 30분부터 창구를 오픈하니 그때 표를 구매하면 된다고 하더군요. 쫄보답게 페리 터미널 한편에 있는 여행 안내 센터에 가서 다시 여쭤봤습니다. 역시 예약 없이 당일 와서 구매하면 된다고 하시더군요. 이쯤되면 확실한 것 같아서 안심하고 호텔로 향했습니다. (나중에 호텔 프론트에 계신 분께 와카사는 진짜 예약 안해도 되냐고 또 여쭤본 건 비밀.)


다네가시마 아라키 호텔

  아고다에서 미리 숙소를 알아볼 때 다네가시마에서는 선택권이 딱 두 개였습니다. 아라키 호텔과 렉스턴 호텔이었죠. 현지에 가서 민박 같은 것을 알아보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저는 성수기의 주말에 방문하는 형편이라 좀 위험할 것 같았습니다. 다른 경로로 알아본 몇몇 숙소들이 실제로 만실이기도 했거든요. 그래서 그냥 둘 중에 고르기로 했습니다. 렉스턴 호텔이 최근에 지어서 (사진으로는) 더 깨끗해 보였고, 숙박비도 아라키의 반값이었지만 저는 위치 때문에 아라키 호텔로 정했습니다. 

  아라키 호텔은 니시노오모테 항에서 걸어서 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깝습니다. 주변에 주점이라든지 마트도 있어서 편합니다. 다네가시마에서 가장 번화한 곳에 있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나중에 렉스턴 호텔 앞을 지나갔는데, 생각보다 더 외진 곳에 있더군요. 밤에 여기저기서 먹고 마실 계획이라면 렉스턴보단 아라키가 좋을 듯합니다. 렉스턴 옆에도 굉장히 큰 마트가 있긴 한데 식당이나 주점은 전혀 없어보였거든요. 돌아다니면서 먹고 마실 계획이 없으시다면 아예 다른 형태의 숙소를 추천합니다. 드물긴 하지만 호텔 말고 다른 형태의 숙박업소를 보긴 보았습니다. 렉스턴보다 더 예쁜 위치에 말이죠. 


(하얗고 큰 건물이 다네가시마 아라키 호텔입니다.)


  아라키 호텔은 사진으로 봤을 때 너무나 낡아보였기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봐도 항구에 있는 뭐 '청해장'이라든지 그런 여관 느낌이잖아요? 다만 실제로 보니까 사진보다는 좀 나아보였습니다. 결혼식도 할 수 있는지 1층에는 결혼 예복이 전시되어 있더군요. 로비는 화려하진 않았지만 상당히 정갈한 느낌이었습니다. 투박한 인테리어지만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면서 퇴적된 어떤 분위기가 느껴졌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무려 1848년부터 영업을 한 호텔이더군요. 물론 그때는 지금의 형태랑은 많이 달랐겠지만, 뭔가 '자본'의 힘이 아니라 '가업'의 힘으로 여기까지 온 게 아닐까, 멋대로 상상해보았습니다. 

  이모뻘 되시는 프론트 직원 분께서 저를 맞이해주셨습니다. 역시 어마어마하게 친절하셨습니다. 기계적인 미소가 아니라 '참 마음씨 좋은 아주머니구나' 싶은 자연스러운 미소로 응대해주시더군요. 체크인은 두 시부터로, 아직 시간이 꽤 남아있었습니다. 먼저 바이크를 빌릴 만한 곳이 있냐고 여쭤보았습니다. 여기저기 전화를 하시더군요. 아쉽게도 샵에 남아있는 바이크가 없다고 합니다. 성수기는 성수기인가 봅니다. 아라키 호텔에서 자전거를 대여할 수 있다는 정보를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거라도 빌릴 수 있냐고 여쭤봤습니다. 빌릴 수 있지만 호텔에서 빌리면 대여료가 하루에 5,000엔으로 무척 비싸고, 밖에서 빌리는 걸 권하시더군요. 그러면서 다시 전화를 어딘가로 거시더니, 하루에 1,000엔에 빌릴 수 있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 아니, 이 사람들은 장사를 어떻게 하는 거지요? 자기네 자전거도 있는데 밖에서 싸게 빌리는 자전거를 섭외해주다니요. 직접 지도를 인쇄해 렌탈 샵의 위치를 표시해주시더군요. 상당히 정신나간 친절에 잠시 전개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아무튼 짐을 맡겨 놓고 호텔 밖으로 나섰습니다. 


니시노오모테 동네 구경 

  일단 자전거를 빌리러 갔습니다. 렌탈 샵은 호텔에서 100여 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습니다. 젊은 남성 분이 운영하고 계시더군요. 이름과 숙소 따위를 적고, 1,000엔을 내는 것으로 간단히 대여가 되었습니다. 여권을 복사했던 것 같기도 한데 잘 기억이 안 나네요. 아무튼 굉장히 친절했습니다. 바이크 렌탈을 주로 하고 자전거는 세 대 정도 구비해놓고 있는 것 같더군요. 바이크는 역시 없냐고 다시 여쭤봤는데 모두 렌트되었다고 합니다. 오후에는 바다에 가서 놀고 싶었기에 샵 사장님께 니시노오모테 북쪽에 있는 '우라타' 까지 자전거를 타고 갈 수 있냐고 여쭤봤는데 '절대로 무리'라고 하시더군요.^^ 가장 가까운 해수욕장은 남쪽에 있는 '요키노'인데 여기까지는 30분 정도면 갈 수도 있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좋은 정보입니다.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자전거를 끌고 나왔습니다.

  일단은 동네를 한 바퀴 돌기로 했습니다. 날이 무척 뜨거웠지만 자전거를 타고 달리니 한결 낫더군요. 니시노오모테를 크게 한 바퀴 돌면서 밥을 먹을 만한 곳을 찾아보았습니다. 니시노오모테는 생각보다 더 한적한 곳이었습니다. 잘 정비되어 있어서 낙후된 느낌은 들지 않지만, 상업 시설은 생각보다 별로 없었습니다. 특히 식당은 거의 없고 주점이 10여 개 정도 있었는데, 낮 시간에는 대부분 영업을 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가게든지 영업을 잘 안하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다들 휴가라도 간 것일까요? 도시락 가게 하나는 영업 중이었는데 손님이 매우 많더군요. 아무튼 낮에는 식사를 할 곳이 그리 많지 않아 보였습니다. 


후샤 (패밀리 레스토랑)

(다네가시마에서 첫 식사를 한 '후샤'. 기와 모양으로 장식된 저기입니다.)


  그러다가 호텔에서 멀지 않은 사거리에서 '후샤'라는 가게를 찾았습니다. Fusha라고 써있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벽에 그려진 그림으로 볼 때 '풍차'의 일본어가 아닌가 합니다. 외벽에 걸려 있는 사진으로 볼 때 파스타나 피자, 도리아 같은 것을 파는 패밀리 레스토랑인 것 같았습니다. 안을 슬쩍 보니 손님이 매우 많더군요. 점심 먹을 곳이 별로 없다보니 다 여기로 온 거 아닐까 싶었습니다. 소심맨이라서 혼자 들어가기가 약간 망설여졌지만 별 수 없습니다. 배가 무척 고프고 날은 더웠으므로, 그냥 태연한 척 하면서 들어갔습니다. 

  많은 아르바이트생들이 바쁘게 서빙을 하고 있더군요. 저는 조리실과 면한 바 자리로 안내받았습니다. 생맥주 한 잔과 무슨 카츠 정식을 시켰습니다. 민치 카츠 였던 것 같아요. 아르바이트생들이 굉장히 앳되어 보였는데, 현지의 여학생들이 아닌가 합니다. 화장기가 전혀 없는, 까무잡잡한 피부가 굉장히 건강해보였습니다. 손님이 너무 많아서 막 허둥지둥 움직이는데 약간 안쓰러운 마음이 들더군요. 그래도 친절은 잃지 않아서 왠지 대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뭔 아빠 같은 소리를 하고 있네요. 요점은 후샤가 좀 촌스럽지만 왠지 기분이 좋아지는 가게라는 것입니다. 

(정말 시원했던 맥주. 첫 모금을 마시는 순간 모든 것이 잘되고 있다는ㅡ 그런 기분이 들었습니다.)


(곧 나온 민치카츠 정식. 조금 아기자기한 느낌? 나이가 어려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민치카츠(확신할 수 없으나)는 그저 그랬는데 맛있었습니다. 무슨 이상한 소리냐, 싶지만 그냥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무슨 육즙이 어쩌고 그런 이야기는 어울리지 않고요, 카츠 자체는 그냥 한X 도시락에 들어가는 돈가스보다 조금 나은 정도가 아닌가 합니다. 다만 저 흰밥, 미소시루, 우엉, 나폴리탄 같은 구성품들이 뭔가 '서툴지만 최선을 다했어!'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구색을 갖추려고 한껏 애를 쓴 것이 귀여운 느낌 있잖아요. 애인이 '오늘 처음 해보는 거라서 맛은 없을지 모르지만 맛있게 먹어줘' 하면서 내미는 한 상의 느낌? (사람은 어째서 경험해본 적이 없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요?) 아무튼 외딴 섬, 그리고 그 섬에 왠지 잘 안 어울리는 유럽풍의 가게, 두건과 앞치마를 한 채 허둥지둥 움직이는 아르바이트생들,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서 정감 있는 한 끼를 먹었습니다. 맥주도 두 잔이나 마셨고요.    


요키노 해수욕장

 점심을 먹고 아라키 호텔로 돌아가 체크인을 했습니다. 대충 짐을 풀어놓고 수영복을 챙겨서 요키노 해수욕장으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한쪽 방향으로 쭉 달리면 되니까 길 찾기는 쉬웠습니다. 다만 오르막길이 꽤 많아서 자전거로는 가볍게 다녀오기 어렵습니다. 저는 튼튼하고 시간이 많으니까 그냥 꾸역꾸역 갔습니다. 30분쯤 달리니 해안도로가 나왔습니다. 도로를 따라 백사장이 길게 펼쳐져 있고, 바디보드를 즐기고 있는 한두 명의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요키노까지 가지 귀찮으시면 그냥 여기서 뛰어드셔도 됩니다. 저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기분좋게 조금 더 갔고, 곧 요키노 해수욕장이라는 큰 간판을 발견했습니다.

  해안 방향으로 들어가 주차장을 지나면 도로쪽에서는 보이지 않는 해수욕장 입구가 있습니다. 간단한 음식과 칵테일 따위를 파는 노천 펍이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옆에는 서핑보드와 튜브 따위를 대여해주는 작은 가게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게에서 관리하는 샤워실과 탈의실이 있습니다. 이것이 부대시설의 전부입니다. 코인로커는 없다고 하더군요. 섬주민들이 운영하는 그냥 작은 해수욕장입니다. 뛰어들기 바빠서 사진은 전혀 안 찍었네요. 핫핫.

  바다는 평범하다, 라는 느낌이었습니다. 동남아 휴양지 같은 그런 풍경은 아니고요. 동해 느낌인데 백사장이 좀 짧고 물이 조금 더 맑은 정도입니다. 부표와 끈을 이용해 해수욕 구역을 만들어놨더군요. 안전요원도 한분 상주하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가방을 대충 백사장에 던져놓고 바로 뛰어들었습니다. 물이 적당한 온도라서 기분이 좋더군요. 바다에 둥실둥실 떠서 햇빛을 쬐기도 하고, 본격 파워수영을 하기도 했습니다. 해수욕 구역이 꽤 넓고 물이 깊은 곳도 있기 때문에 수영을 즐기기에는 충분합니다. 외국인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전부 가족이나 친구들끼리 온 일본인들 같더군요. 튜브를 타고 링가링가하거나 공놀이를 하거나 뭐 그런 평화로운 분위기였습니다. 

  아시다시피 다네가시마는 서핑이 유명합니다. 아까 본 가게에서 서핑 레슨도 하는지 해수욕 구역 옆에서 서핑을 배우는 젊은이들도 있더군요. 저는 서핑을 한국에서만 두 번 해보았는데 꽤 재밌었거든요. 그래서 요키노에서도 해볼까 했는데 파도가 별로 없는 것 같아 그만두었습니다. 요키노는 서핑 스팟이라기보다는 그냥 가족 해수욕장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 서핑보다는 차라리 바디보드를 즐기는 사람들이 더 많아보이더군요. 

  몸이 노곤해질 때까지 물에서 놀다가 나왔습니다. 가게에 100엔을 지불하면 샤워실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샤워를 하고 나와서 칵테일을 한 잔 할까했는데 입간판에 적혀 있는 메뉴가 전부 일본어라서 조금 까다로웠습니다. 그리고 자전거로 다시 돌아가려면 체력을 조금 아껴야 할 것 같아서 그냥 관뒀습니다. 해가 적당히 기울어져서 올 때보다는 한결 시원하게 자전거를 탈 수 있었습니다. 사진도 몇 장 찍었지요. 


(해안도로를 따라 자전거를 타는 기분이 썩 좋았습니다.)


(요키노와 니시노오모테항 사이에 있는 대형 마트. 구경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위의 마트 옆에 있는 렉스턴 호텔. 괜히 찍어봤습니다.)


(바다를 따라 달리다보니 막다른 골목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왠지 재미있었습니다.)


(벤치에 몇 개의 낙서가 있는데 '이창운' 씨께서 성함을 남기셨더군요. 누구신지는 물론 모릅니다.)


(동네에서 찍어본 파노라마 사진. 이렇게 한적한 곳입니다.)


  니시노오모테로 돌아와 아까와는 반대 방향, 즉 북쪽으로 조금 가보았습니다. 역시 상점이나 식당은 거의 없더군요. 버스 정류장을 발견했는데 부착되어 있는 노선도나 시간표를 보니 실제로 이용하기는 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일은 어쩌나 하고 일단 자전거를 샵에 반납하러 갔습니다. 저녁에는 어딜 돌아다닐 계획이 없었거든요. 반납하면서 '내일도 바이크가 없냐'고 여쭤보니 내일은 한 대가 있다고 하더군요. 오! 바로 예약했습니다. 아침 9시부터 대여가 가능하다고 하더군요. 인적사항을 적어두고 샵을 나왔습니다. 바이크가 없으면 좀 심심할 뻔했는데 이렇게 일이 풀리다니 기분이 좋더군요. 


아카오기 온천

  아라키 호텔의 옆에는 아카오기 온천이라는 대중목욕탕이 있습니다. 아라케 호텔에 체크인할 때 온천 티켓을 하나 주는데, 숙박객은 이 티켓으로 온천을 입장료 없이 이용할 수 있습니다. 1회권이 아니라 체크아웃할 때까지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티켓입니다. 식사는 좀 늦게 할 셈으로 일단 온천에 가보기로 했습니다. 빨래도 하고 싶었는데, 코인 런드리가 온천에 있다고 하더라고요. 

   객실에 비치되어 있는 유카타를 입고 가려고 했습니다. '지금 땀에 쩔었는데 이 상태에서 유카타를 입고 갔다가 씻고 다시 입어야 하나? 아니면 유카타를 챙겨갈까?' 라거나 '유카타 안에 속옷을 입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따위를 저답게 쓸데없이 고민했습니다. 아니, 그 전에 '이걸 입고 밖으로 나가도 되긴 되는 건가' 따위를 고민했습니다. 소심맨답게 인터넷으로 좀 찾아보니 입고 나가도 될 것 같더군요. 단, 속옷은 입고 유카타를 입기로 했습니다.^^  

  온천은 최근에 리모델링을 했는지 외관이 굉장히 깨끗했습니다. 아카오기가 '붉은 기와'라는 뜻인가요? 외장이 붉은색으로 되어 있는데 괜히 들어가보고 싶게 생겼습니다. 온천은 첫 경험이라 약간 설레하며 문을 열고 들어섰습니다. 카운터에서 사장님과 사모님 (제멋대로 부부라고 생각)이 반갑게 맞아주시더군요. 티켓을 보여드리니 즐겁게 이용하시라며 남탕은 저쪽이라고 안내해주셨습니다. 일단 세탁실에 가서 빨래를 잔뜩 돌려놓고 남탕으로 들어갔습니다. 

  남탕 거실로 들어가니 사물함이 벽을 따라 있고 한쪽에는 드라이기와 거울 따위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체중계도 있더군요. 우리네 대중목욕탕과 그리 달라보이지 않았습니다. 노천탕이 아니면 뭐 다 이런 느낌인 것일까요? 다른 온천에 안 가봐서 비교는 할 수 없는데 아무튼 친숙한 느낌이었습니다. 옷을 다 벗고 들어가볼까- 하는데 아무리 찾아도 수건이 안 보이더군요. 다시 카운터로 나갔습니다.


  저   : 수건은 어디에 있습니까?

사장님 : 아, 수건은 직접 준비하셔야 합니다. 호텔 객실에서 가져오실 수 있습니다.

  저   : 헉. (호텔 프론트에서 온천갈 때 객실 수건 가져가라고 말해준 걸 이제 기억함.)

사장님 : 하하. 다시 다녀오셔도 됩니다. 아니면 오른쪽에 유료지만 자판기가 있습니다. 

  저   : 그럼 자판기에서... (다시 다녀오기 매우 귀찮았음.)

사장님 : 큰 수건은 14번을 누르시면 됩니다.^^


  카운터 옆에는 자판기가 있는데 음료나 수건, 세면도구 따위를 구입할 수 있습니다. 물건이 직접 나오는 것이 아니라 돈을 넣고 버튼을 누르면 티켓이 나오고, 이 티켓을 카운터에서 물건과 교환하는 것입니다. 이것 참 일본다운 시스템이구먼, 하면서 수건 티켓을 뽑아 카운터에서 교환했습니다. 어째서인지 카운터에서는 수건과 함께 비닐봉지도 하나 주더군요. 이건 왜 주지? 싶었지만 어쨌든 챙겨서 다시 남탕으로 왔습니다. 흥얼흥얼 이제 진짜 들어가야지- 하는데 다 쓴 수건은 어떻게 하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네, 저답게 다시 카운터에 갔습니다.^^


   저  : 죄송합니다만 쓴 수건은 어디에...?

사장님 : 아, 그 비닐봉지에 넣어서 카운터로 주시면 됩니다.^^

   저  : 아하! 감사합니다. 핫핫;;


  네 이렇게 카운터를 두번 왔다갔다한 다음에야 저는 탕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탕 내부도 우리 대중목욕탕과 그렇게 다르진 않았습니다. 손님은 그렇게 많지 않더군요. 작지만 야외 공간에 있는 탕도 있었어요. 가족탕 같은 것은 없으니 따로 이용하셔야 합니다. 연인끼리 가셔도 같이 목욕을 할 수는 없습니다.^^ 어쨌든 뜨끈하게 몸을 담그고 피로를 조금 풀었습니다.

  목욕을 마치고 나오니 무척 개운하더군요. 유카타는 목욕 후에 입기에 참 좋은 옷인 것 같습니다. 생긴 게 목욕 가운이나 별반 다를 게 없으니 뭔가 쾌적(?)하더라고요. (여성분들이 원피스를 입었을 때 이런 기분일까요? 저는 어떤 자유를 느꼈습니다.) 빨래가 아직 십여 분 남았길래 자판기에서 맥주 티켓을 뽑았습니다. 네, 목욕을 하고 바로 생맥주를 사먹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제가 가장 만족스러웠던 부분입니다. 훗훗. 맥주를 주시면서 사장님이 어디에서 왔냐고 물으시길래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꽤 놀란 표정으로 반갑다고 하시더군요. 한국 사람들이 그다지 오지 않나봐요. 아무튼 홀에서 시원한 생맥주를 마시면서 올림픽 중계를 잠시 봤습니다. 첫 모금은 제 인생에서 손꼽을 만큼 시원한 맛이었습니다. 애인도 없었고, 곧 빨래를 주섬주섬 들고 호텔로 홀로 돌아가야 하지만 기분이 좋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안분지족, 시조라도 한 수 뽑고 싶었습니다. 왠지 알콜중독자 같네요. 뭐 마시기만 하면 다 좋대. 어쨌든 이렇게 저의 온천 체험은 끝났습니다. 


아라키 호텔 : 비어가든

  일찍 잘 셈이었기 때문에 저녁은 아라키 호텔에서 먹기로 했습니다. 아라키 호텔의 5층에는 WAKASA라는 레스토랑과 비어가든이라는 주점이 있습니다. 같은 주방을 공유하며 규모는 둘다 그리 크지 않습니다. WAKASA는 예약을 하면 카이세키 요리를 즐길 수 있는 것 같았습니다. 유카타를 입은 일본인 가족들이 많이들 식사를 하고 있더군요. 저는 물론 비어가든으로 향했습니다. 

  비어가든은 옥외에 좌석이 마련되어 있는데, 고급스럽진 않지만 꽤 운치가 있습니다. 역시 일본인 가족들이 바베큐 요리를 많이 즐기고 있었어요. 6인용 테이블에 혼자 앉았더니 좀 멋쩍더군요. 바베큐가 주력 메뉴인 것 같았지만 혼자서는 좀 번거로워서 종업원 분께 다른 메뉴 추천을 부탁드렸습니다. 흰살 생선의 카르파쵸를 권하시더군요. 카르파쵸가 뭔지 몰랐는데 설명을 들어보니 사시미를 야채와 함께 이러쿵저러쿵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시미는 늘 옳기 때문에 괜찮겠지 하고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쇼츄도 한 잔 부탁드렸지요. 주문을 해놓고 생각해보니 쇼츄 쿠폰이 있는데 방에 두고 온 것이 생각났습니다. 비어가든 간다고 하니까 프론트에서 쇼츄 1잔을 받을 수 있는 쿠폰을 주셨거든요. 말하고 가져올까 했지만 귀찮아서 그냥 두기로 했습니다.^^ 

  카르파쵸가 나왔는데 음, 제가 생각한 그런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시큼한 맛이 나는 일종의 사시미 샐러드인데 나중에 알아보니 이태리 요리인 것 같더라고요. 게다가 메인이라기보다는 전채 요리^^ 이게 맛있게 만든 카르파쵸인지 대충 만든 카르파쵸인지 그건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카르파쵸라는 요리 자체가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사시미는 굳이 야채와 드레싱에 버무릴 것 없이 그냥 사시미로 먹을 때가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헛헛한 마음에 꼬치도 몇 개 주문했는데, 이것도 왠지 별로 맛이 없더군요. 여럿이 가서 바베큐를 드실 게 아니라면 비어가든은 그다지 권할 만한 선택은 아닌 것 같습니다. 대충 배를 채우고 방에 식대를 달아둔 뒤에 내려왔습니다. (나중에 체크아웃할 때 보니까 쇼츄값을 빼줬더라고요. 제가 말한 것도 아닌데, 아라키 호텔 oh oh)


  왠지 허전하여 동네를 한 바퀴 돌았습니다. 낮과는 달리 주점들이 불을 밝히고 영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딘가에 들어가 한 잔을 더 할까 생각했지만 내일 일찍 바이크를 빌리러 가야 하기 때문에 관뒀습니다. 맥주 한 캔만 사들고 방에 돌아왔습니다. 방은 무척 작지만 혼자 있기는 충분히 컸습니다. 제 방은 '옆 건물 뷰'라서 창문을 열고 밤바다를 바라보며... 같은 것은 할 수 없었어요. 내일의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챙기고 누웠습니다. 별달리 할 수 있는 게 있었을까요? 내일은 바이크를 타고 다네가시마를 한 바퀴 돌 것입니다. 이번 여행에 하이라이트가 있다면 그건 내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 하이라이트는 언제나 내일이거나 어제일까, 뭐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곧 잠에 빠졌습니다.


    

    

  

 

     




Posted by (운영중지)




시라타니운스이쿄와 조몬스기를 하루에

  여행 일정을 가늠할 때 가장 고민되는 부분이 야쿠시마에서의 2박 3일이었습니다. 저도 다른 여행자들처럼 시라타니운스이쿄와 조몬스기에 관심이 있었는데, 2박 3일이라는 짧은 일정 내에 어떻게 움직여야 저 둘을 즐길 수 있을지 생각했습니다. 섬에 들어가고 나가는 배편, 섬 안에서의 교통편, 해가 뜨고 지는 시각, 저의 체력과 등산 경험 뭐 이런 많은 것들 고려해야 해서 어려웠습니다.

  일단 조몬스기 코스는 '안보'에서 출발하는 것이 보통이라 어려웠습니다. 제 숙소는 '미야노우라' 방면에 있기 때문이죠. 실제로 움직여보진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미야노우라에서 안보까지 자동차로 최소 30분 이상은 걸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른 아침에 안보까지 갈 때나 코스를 마치고 늦게 미야노우라로 돌아올 때 대중교통을 확보할 수 있을지 고민이었죠. 그리고 어떻게 성공한다고 해도, 그럼 시라타니운스이쿄는 언제 가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라타니운스이쿄는 미야노우라쪽에서 시작하는 것이 편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걸어서 접근할 수 있는 거리는 아니거든요. 조몬스기 코스만 10시간은 걸리기 때문에 가운데 날을 조몬스기에 쓰면, 시라타니운스이쿄는 섬에 들어온 날이나 나가는 날에 가야 하는데, 선박 시각을 고려하면 둘다 여의치 않아보였습니다.   

  둘중에 하나를 포기하는 것도 방법이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더군요. 그래서 확신은 없었지만 일단 둘을 하루에 본다는 생각으로 야쿠시마에 갔습니다. 시라타니운스이쿄 입구에서 출발, 시라타니운스이쿄를 뚫은 뒤에 조몬스기 코스에 올라타서 조몬스기를 보고, 다시 시라타니운스이쿄를 거쳐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았지요. 12시간 정도 걷는 것을 예상했습니다. 어차피 '읭 다리 아파, 잠깐만 쉬었다 가자' 라거나, '앙 저기 사슴 있어 사슴' 같은 말을 할 동행자도 없으니, '난 튼튼해! 난 하루만에 할 수 있어! '라는 객기를 부릴 수 있었죠.  이번 글은 저 둘을 하루에 볼 수 있는지, 가능은 하다고 쳐도 그것은 권할 만한 일인지, 이 의문에 대해 제 경험을 써보려고 합니다.   


출발 전 준비

  제가 숙박한 센노이에 앞에 있는 '우시토코 공원' 정류장에서 시라타니운스이쿄 입구까지 가는 첫 버스가 5시 7분에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12시간쯤 걸린다고 예상했을 때, 하산한 뒤 숙소로 돌아오는 버스를 타려면 이 시각에는 반드시 출발을 해야했습니다. 아래쪽에 버스 시간표를 보시면 제가 동그라미를 쳐놓은 두 군데가 보이실 것입니다. 오후 5시 10분에서 시라타니운스이쿄 입구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다시 센노이에로 돌아올 계획이었죠. ('※'표시가 되어있는 부분은 7/29~8/31, 9/17~9/24 동안만 운영하는 버스라고 써있죠. 제가 운좋게 이 때에 맞춰서 갔기 때문에 대중교통으로만 움직이면서도 시라타이운스이쿄와 조몬스기를 하루에 돌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 미야노우라 항과 시라타니운스이쿄를 오고가는 셔틀 버스의 시간표입니다.)


  4시쯤 기상했습니다. 센노이에에서 준비해준 침구가 포근해서였는지, 몸이 무척 가벼웠습니다. 일단 어제 사둔 도시락과 컵라멘으로 아침을 든든히 먹었습니다. 산에서는 제대로된 식사를 하기가 어려울 테니까요. 그리고 샤워를 하러 집밖으로 나갔는데, 제가 쓰는 목욕 별채 앞에 불이 켜져 있더군요. 어제 직원 분과 대화하다가 '내일은 새벽에 나갈 거다' 라고 말했었는데, 깜깜해서 목욕탕을 못 찾을까봐 미리 붙을 켜두셨더라고요. 하, 이런 친절한 사람들 같으니. 

  씻었으니 짐을 쌀 차례입니다. 등산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에 약간 걱정도 됐습니다. 환경이 가혹하다기보다는 그저 장시간 걷는 코스기 때문에 짐을 최대한 줄여서 몸을 가볍게 하려고 했습니다. 제가 준비한 물품은 다음과 같습니다.


  복장 : 상의는 반팔, 하의는 언더레이어에 반바지. 목장갑. (여분의 의복은 안 챙겼습니다.)

  가방 : 집 앞 아울렛에서 10,000원에 사온 책가방.

  신발 : 어제 빌린 등산화. 

  식량 : 빵 1, 에너지바 1, 소시지 1, 육포 1, 사과 1, 바나나 2.

  음료 : 물 1L, 이온음료 500ML.

  기타 : 수건, 헤어밴드 겸 마스크(?), 우비, 대일밴드, 랜턴, 안내 지도, 휴대 전화. 


  별 거 없습니다. 식량이 좀 신경쓰였는데 다른 여행기를 보니 도시락을 미리 주문해놨다가 새벽에 찾아서 가는 방법도 있더라고요. 더운 여름인데 빨리 상하지 않을까 걱정도 됐고, 땀을 질질 흘릴 것이 뻔한데 밥알도 잘 안넘어갈 것 같아서 저는 그냥 간식과 과일 위주로 챙겼습니다. (물론 어디서 어떻게 주문해야 할 지 잘 몰랐고, 주문하고 찾기가 귀찮기도 했음.) 어차피 한 끼 정도만 해결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실제로 식량은 충분했습니다. 랜턴은 해 뜨기 전에 입산할 것 같아서 챙겼는데 실제로는 필요 없었습니다. 해가 무척 빨리 뜨더라고요. 그리고 야쿠시마는 비가 무척 자주 온대서 우비도 괜찮은 것으로 챙겨갔는데 비가 안왔습니다. 다만 장갑과 수건은 꽤 요긴했습니다.


센노이에에서 시라타니운스이쿄 입구로

  우시토코 공원 정류장에 나갔습니다. 정류장이라고는 해도 그냥 표지판 하나가 고철처럼 덜렁 서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기다리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여기로 정말 버스가 오나' 싶은 느낌이었죠. 아니나 다를까 5시 7분이 됐는데 버스가 안 오는 겁니다. 상당히 불안해졌습니다. 숙소로 돌아가 직원 분을 깨워서 물어봐야 하나 어쩌나 발을 동동하고 있으려니 버스가 5시 15분쯤 오더군요. 이번 일본 여행에서 교통편이 정시를 어긴 것은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버스는 등산객들로 가득했습니다. 대부분은 일본 분들로 보였습니다. 남 눈치 잘보는 한쿡 사람답게 나 혼자 이상한 복장을 하고 있지 않나 두리번두리번 했는데 다행히 별 차이 없더군요. 오히려 저보다 더 가벼운 느낌으로 온 분들도 많았습니다. 만석이었기 때문에 통로에 서서 가는데 버스가 굽이굽이 산길을 잘도 올라가더군요. 올라가는 중에 날은 점점 밝아오고, 시라타니운스이쿄 입구에는 5시 30분쯤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이 버스도 탈 때 번호표 뽑고 내릴 때 번호에 따른 금액을 내는 시스템이었던 것 같습니다. 대략 400~500엔 정도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시라타니운스이쿄 입구. 300엔의 협력금을 지불합니다.)


 입구에는 안내소가 있는데 직원분은 안 계셨습니다. 서양 형님 두 분이 저에게 일본어로 '입구가 어딥니까?'라고 묻더라고요. 제가 영어로 '나도 여행자라서 잘 모르는데 여기 같다'라고 하니까 '근데 왜 아무도 없어, 돈 내야 되는 거 아냐?'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뭘 알겠습니까? 그냥 으쓱 했죠. 300엔을 내야 한다는 건 저도 알고 있었는데 돈 받는 분이 없으니 난감하더라고요. 입구에 가서 보니 돈을 넣는 통은 있었습니다. 그냥 자율적으로 넣는 건가 보다, 하고 300엔을 그냥 그 통에 넣었습니다. 이게 '입장료'라기 보다는 '협력금' 개념이라서 그럴까요? 아무튼 여러분 야쿠시마의 환경을 위하여 300엔을 냅시다. 


(입구 옆에 있는 안내도. 한글도 있습니다.)


  입구 옆에 시라타니운스이쿄의 전체적인 안내도가 있습니다. 대략 초록색 코스, 노란색 코스, 빨간 색 코스가 있습니다. 안내도에 '15번' 지점이 조몬스기 코스로 넘어가는 출구입니다. 일단은 최단 거리로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초록색 코스를 따라 15번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시라타니운스이쿄 : 초록색 코스

 본격적으로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아직 6시도 안된 시각입니다. 이른 아침이라서 그런지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무슨 순례길처럼 '어떤 인파에 쓸려가는 듯한' 그런 등산이 아니라는 점이 매력적이었습니다. 차라리 외딴 숲을 그냥 혼자 헤매는 느낌입니다. 지금까지는 주절주절 여러 가지를 썼습니다만 오히려 지금부터는 쓸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저 걷고, 또 걷고, 또 걷습니다. 생각을 하면서도 걷고, 아무 생각 없이도 걷고, 두 발로도 걷고, 네 발로도 걷고, 뭐 그냥 걷습니다. 한 시간 반 비행기를 타고, 또 다섯 시간 동안 배를 타고 도착한 이곳에서 저는 무얼하고 있었을까요? 뭘하긴 뭘해요. 그냥 걷고 있었습니다. 산을 왜 오르냐는 질문에 혹자는 산이 거기에 있으니까 오른다고 대답했다지만, 거기 있다고 꼭 오를 필요는 없는 것인데 말이죠. 그런 식이라면 저도 늘 '거기'에 있습니다만 어째서 그녀들은 제게 오지 않고, 그녀들도 늘 '거기'에 있습니다만 저는 어째서 그녀들에게 가지 않을까요. 뭐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또 걷습니다.    


(시라타니운스이쿄는 무척 녹색입니다. 녹색 속을 계속 걷습니다.)


(이런 식으로 이정표가 있어서 편합니다. 이정표 보고 계속 걷습니다.)


  시라타니운스이쿄는 상당히 녹색이기 때문에 일단 건강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한편 군데군데에 큰 나무가 쓰러져 있거나, 혹은 그루터기만 남아 있는데, 저는 이쪽에 눈이 갔습니다. 아마도 이곳에서 목재를 얻던 과거의 흔적인 것 같아요. '죽은 나무들'이라고 생각하니 시라타니운스이쿄 전체가 어떤 고대의 전장(場)처럼 느껴졌습니다. 신과 요정의 시대에 나무 병사들이 참전한 어떤 거대한 전쟁이 있었고,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그 승리의 일부를 누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보았어요. 푸른 이끼의 생동감과, 나무의 시체가 주는 쓸쓸함이 묘하게 대비되는 공간이었습니다. <헬보이2:골든 아미>에서 엘리멘탈이 죽는 장면이 생각나더군요. 그는 아마도 숲의 정령인데, 그가 죽으면서 뉴욕 한복판의 건물과 거리를 녹색 이끼로 뒤덮는 환상적인 장면이 있거든요.  


(이 나무는 살아있는 걸까요?) 


  

타이코이와

  제가 걸음이 빠른 편이긴 하지만 생각보다 금방 초록색 코스의 끝이 왔습니다. 초록색 코스의 끝에는 '타이코이와'라는 거대한 바위에 올라가 야쿠시마를 조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안내도에서는 16번이지요. 15번에서 조몬스기 코스로 바로 갈까, 16번을 들러서 타이코이와를 보고 갈까 살짝 고민했습니다. 타이코이와에 가려면 600미터 정도를 우회해야 하며, 상당히 험한 길을 올라야 하기 때문이죠. 그래도 가보고 싶어서 타이코이와에 가기 시작했습니다. 굉장히 좁고 가파른 길을 두 손을 써가며 오른 뒤, 타이코이와에 닿으니 들르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타이코이와에서 찍은 파노라마 사진. 실제로 보면 훨씬 멋집니다.)


 가파른 길을 기어오르다 보면 갑자기 위 사진과 같은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굉장히 시원했습니다. 딱 가로세로 3미터나 되려나 싶은 바위에 올라 보는 것인데, 잠깐 헛디뎠다가는 바로 낭떠러지라서 후덜덜했습니다. 처음으로 '누가 내 사진을 찍어줬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여기 있었다는 것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을 정도로 멋지더라고요. 일본 청년 두 명이 있었는데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기 조금 쑥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그냥 포기했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이니까요.타이코이와에서 내려와서는 잠시 쉬면서 바나나를 먹었습니다. (왠지 바나나 사진은 찍어뒀더군요.)


조몬스기를 향해

  15번 지점을 통과해서도 20~30분 정도를 걸으면 조몬스기 코스랑 겹쳐지는 쿠스가와 분기점이 나옵니다. 산길을 막 내려오다보니 갑자기 철길이 등장하더군요. 조몬스기 코스에는 이 목재운반용 철길을 따라 한참 걷는 길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반가웠습니다. 이때가 몇시쯤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8시가 안됐을 때입니다. 그러니까 시라타니운스이쿄를 뚫고, 타이코이와까지 보고 조몬스기 코스로 진입하는 데에 두 시간 정도가 걸린 셈입니다. 뭔가를 '주파'하듯이 움직였다는 것을 알아주세요. 만약 '조심해 여기 미끄러워'하면서 누구의 손도 잡아주고, '내가 물 떠올게, 잠깐 기다려' 뭐 이런 일을 했다면 시간이 좀 더 걸렸을 것입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이 있던데, 전 엄청 혼자라서 엄청 빨랐습니다.^-^

  조몬스기 코스에는 사람들이 꽤 있었습니다. 여자도 남자도, 어린 아이도 어르신 분들도 고루고루 있더군요. 저도 그들중 하나입니다만, 왜 조몬스기를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을까요. 7200년 동안 거기에 서있었다는 이 나무가 우리의(저의) 인생을 어떻게 나아지게 할 수 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각자의 이유는 다르겠지만 저의 경우는 정직하게 말하자면 일단 '조몬스기 봤다.'라는 문장을 갖고 싶더군요. 그러니까 이건 어렸을 때에 하던 쓸데없는 놀이들, 예를 들어 '붉은 색 보도블럭만 밟고서 집에 가기' 같은 것의 조금 더 폼나는 버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목표 자체의 의미는 없지만, 그 과정을 완수하는 것이 즐거운 것입니다. 물론 조몬스기 자체가 무언가 감동을 주지 않을까 그런 기대도 있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7200년된 고목을 눈앞에 두는 순간, 그의 몸에 새겨진 계절의 흔적들에 눈물이 났습니다...' 라면서 여행기를 쓸 수 있겠죠. 하지만 과연 그런 일이 일어날까요? 나무야 나무인 것을.

 아무튼 또 걷습니다. 조몬스기 코스는 시라타니운스이쿄보다 정비가 잘 되어 있습니다. 초반부는 왼쪽처럼 옛 철길을 따라 걷게 되어 있고, 후반부의 등산로도 상당히 많은 구간이 나무 계단으로 정비가 되어 있어서 걷는 것 자체는 편합니다. 험한 길은 별로 없었습니다. 드물긴 하지만 그냥 스니커즈를 신고 편하게 온 분들도 있더군요.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정비가 잘 되어 있다고는 해도 길이 좁아서 앞사람을 추월할 때나 맞은 편에서 오는 사람을 만나면 약간 불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역시나 일본분들은 참 예의가 몸에 배어 있더라고요. 앞사람의 속도에 맞추지 못하고 괜히 추월한 것은 이쪽인데, 추월 당한 쪽에서 '(제가 느려서) 실례' 라고 해버리니까요. 마주칠 때도 꼭 '먼저 가세요'라든지 '실례합니다'라든지 인사를 건네 주셨습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백 번은 넘게 말한 것 같습니다. 나중에 하산할 때는 다리가 아니라 입이 아플 정도였습니다.

 조몬스기까지는 꽤 가야합니다. 그리고 이정표가 시라타니운스이쿄만큼 명시적이지 않기 때문에 약간 헷갈리는 때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다행인 것은 사람이 제법 있어서 따라 가기도 하고 물어보기도 하다보면 조몬스기에 도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몬스기로 가는 길에는 윌슨 그루터기를 비롯해서 유명한 삼나무들을 구경할 수 있는데, 나무나 숲의 생태에 관심이 많은 분이라면 상당히 즐거운 시간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슴들. <황조가>가 생각나네요. 훨훨 나는 저 꾀꼬리, 암수 서로 노니는데...)


조몬스기

  '이쯤 되면 나올 때가 됐는데' 상태에서 한 시간쯤 더 걸으면 조몬스기가 나옵니다. 저는 제가 혹시 모르고 지나친 것은 아닐까 생각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조몬스기 근처에 가면 아래처럼 분명한 표지판이 나옵니다.

(조몬스기에 근접하면 나오는 표지판. 다왔습니다.)


  직접 본 조몬스기는, 일단 '멀잖아!' 느낌이었습니다. 조몬스기 근처에는 관광객들이 편하게 볼 수 있도록 나무 데크가 설치되어 있는데, 나무 보호를 위해서인지 꽤 멀리 설치되어 있어서 조몬스기의 위엄을 느끼기가 조금 어려웠습니다. 아쉽게도 '7200년된 고목을 눈앞에 두는 순간, 눈물이...' 라는 여행기는 쓸 수가 없겠네요. 조몬스기 자체로부터는 그렇게 특별한 감정을 느낄 수는 없었습니다. 왠지 '이 정도 스케일의 나무, 미국이나 캐나다에는 많은 거 아닐까?' 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실망한 것은 아니고요, 그냥 딱 예상했던 만큼이었습니다. 원래 명소, 명물이란 것이 그렇잖아요. '우왓! 드디어!' 하고 마주 대하고 나면 한 5분쯤 뒤엔 '자 이제 그럼 뭐할까'라는 생각이 드는 거죠. 조몬스기가 무슨 죄겠습니까. 죄가 있다면 권태와 허무를 시시각각 느끼는 제가 죄죠.

  조몬스기를 마주했을 때가 오전 10시쯤입니다. 시라타니운스이쿄 입구에서 조몬스기까지 4시간 걸렸습니다. 제 예상보다 한 시간 이상 빨리 도착한 셈입니다. 물론 저는 거의 쉬지 않고 내리 움직였습니다.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잠깐 잠깐 간식 먹듯 했기 때문에 더 빨리 도착했겠죠. 7200년된 나무 앞에서 인간과 세계에 대해 천천히 성찰하는 시간을 보내는 것도 멋지겠지만, 저는 몇 분 가량 나무를 멍하니 보다가 또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즐거움은 나무가 아니라 길에 있는 거 아니겠어요? 이제 목표는 달성했으니 길을 더 느긋하게 즐길 수 있겠지요.


조몬스기에서 멀어지며

  제 생각에 제가 조금 일찍 조몬스기에 닿아서 일찍 돌아나온 편인 것 같아요. 돌아 나오는 길에 저랑 같은 방향으로 가는 사람은 거의 못 만났지만 반대 방향에서 올라오는 사람은 매우 많이 마주쳤거든요. 그래서 길을 계속 비켜줬던 기억이 납니다. 일본분들이 인사말을 너무 잘 하셔서 그다지 불편하다는 감정은 들지 않았습니다. 또 원래 하산하는 쪽에서 길을 비켜주는 거라고 어디서 주워들은 것 같기도 합니다.    

  조몬스기를 앞두고 식사를 하시는 분들도 많이 마주쳤습니다. 일본 분들은 역시 대부분 도시락을 드시더군요. 버너로 물을 끓여서 미소시루나 컵라멘을 곁들이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컵라멘 냄새가 정말 좋더라고요. 여기서 먹으면 뭔들 안 맛있을까요? 삼겹살을 굽거나 하는 것은 민폐겠지만 비교적 취사에 자유롭다는 느낌이니까 라면 정도는 얼마든지 끓여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단, 쓰레기통은 '전혀 없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니까 어떻게든 가방 속에 챙겨 나오셔야 합니다. 

  조몬스기에서 어느 정도 멀어지고 다시 시라타니운스이쿄로 향하는 길은 굉장히 멀게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멀었었나?' 싶기도 하고, '이게 내가 아까 왔던 길이 맞나?'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날이 완전히 밝아져서 그런지, 반대방향에서 봐서 그런지 많이 낯설었거든요. 사람도 거의 없어서 길을 잃은 것은 아닌지 약간 걱정도 됐습니다. 그러나 중간중간 기억이 날 만한 지점들이 있어서 다행히 제대로 갈 수 있었습니다. 슬슬 체력이 떨어지더군요. 이때에 바나나라든지 육포 같은 것을 먹었는데, 연료를 주입한 것처럼 금방 에너지로 전환되는 느낌이 들어서 재밌었습니다. 이때쯤 저는 거의 걷기 머신이었죠.


다시 시라타니운스이쿄 : 노란색 코스

  다시 쿠스가와 분기점을 통해 시라타니운스이쿄로 들어섰습니다. 이때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이 안납니다. 아무 생각 안했던 것 같습니다. 발도 다리도 꽤 아팠지만, 기분은 좋았습니다. 육체를 마음껏 탕진하고 있다는 기쁨이었을까요. 어쩌면 '이렇게까지 걸을 수 있다니 꽤 튼튼하구나 핫핫' 같은 느낌이었는지도 모르겠네요. 갈 때보다는 확실히 시간이 더 걸리는 느낌이었지만, 어쨌든 다시 11번 지점까지 왔습니다. 11번 지점은 갈림길인데, 한쪽은 제가 아까 걸었던 초록색 코스, 한쪽은 안 가본 노란색 코스입니다. 노란색 코스가 두 배 정도 더 길어서 살짝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왔던 길로 다시 가기에는 조금 아까웠고, 시간도 많이 아껴 둔 상태였기 때문에 노란색 코스를 따라 가기로 했습니다.   


(돌아갈 때는 아까와 달리 11번에서 9번을 경유해 6번으로 가는 노란색 코스를 걷기로 했습니다.)


  이 노란색 코스를 선택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 잘한 일입니다. '빼어난 풍경'이라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독특한 감각을 제공하는 코스였어요. '숲'이라는 단어는 매우 흔한 단어고, 우리 모두 초등학교도 가기 전부터 '옛날 옛적 숲속에...' 로 시작하는 동화를 읽습니다. 그 '숲'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만난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기 저 나무 뒤에 잠자는 공주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물론 없었습니다.^^) 게다가 어째서인지 사람이 거의 없더군요. 수십 분을 아무도 마주치지 못하고 걸었을 정도로 한적했습니다. 


(느긋하게 즐기고 싶어서 신발도 벗어놓고 쉬었습니다.)


(계곡물에 사과도 씻어먹었습니다.)


  외딴 섬의 깊은 숲 속,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 사과를 먹는 기분은 특별했습니다. 오래 전 나쓰메 소세키는 'I Love You'를 '오늘 달이 참 밝네요'라고 번역했다는데, 만약 누군가 옆에 있었다면 괜히 '여기 물이 참 맑네요' 같은 소리를 지껄였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사과를 권하고, 사과를 오물거리는 입술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겠지요. 그러나 여기는 그녀도 없고, 친구도 없고, 심지어 타인조차 없었으므로, 저는 온전한 하나의 사과를 저 혼자 다 먹었습니다. 적어도 제 방에서 '히히히 다리 두 개는 다 내 꺼. 날개 두 개도 다 내 꺼' 하면서 치킨을 뜯는 것보다는 기분이 좋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무튼 이 노란색 코스는 정말 좋았습니다. 만약 시간상 시라타니운스이쿄와 조몬스기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전 시라타니운스이쿄를 권하고 싶어요. 특히 이 노란색 코스를요. (하지만 상징성 때문에 여러분도 어떻게든 조몬스기를 보고야 말겠죠? 저처럼-) 조금 덜 더울 때라면 책을 한 권 들고 가서 읽는 것도 좋을 것 같고요, 그러다 잠시 나무 둥치에 기대 깜빡 잠을 자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저는 아쉽게도 체험하지 못했지만, 비가 살짝 오거나 안개가 낀다면 정말 환상적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종료

  다시 시라타니운스이쿄 입구로 돌아왔을 때가 오후 3시쯤이었습니다. 산행을 시작한 것이 오전 6시가 안됐을 때니, 왕복 9시간 정도가 소요된 셈입니다. 생각보다 별로 안 걸렸죠? 아무래도 안내도에 있는 예상 소요 시간은 다소 보수적으로 잡아 놓은 것 같아요. 중간에 밥을 지어 먹는다든지 뽀뽀를 한다든지 그런 걸 안하고 꾸준히 걷는다고 가정하면, 시라타니운스이쿄에서 출발해 조몬스기를 보고 다시 돌아오기까지 10시간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이걸 보면서 '우린 뽀뽀할 거니까 1시간 더 잡자'라고 말하는 커플이 없기를 바랍니다. 산에 존경심을 가져주세요.)

  결론적으로 말해서 당신이 혼자라면 시라타니운스이쿄와 조몬스기를 하루에 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단, 어떻게든 이른 시간에 시라타니운스이쿄 입구까지 갈 교통편이 있어야겠죠. 저처럼 렌트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분이라면, 버스가 증편되는 시기에 가시는 것이 좋을 거예요. '지나가는 택시'란 것은 전혀 없으니, 미리 예약을 해야하는데 이것도 꽤나 귀찮고 게다가 값도 만만치 않은 것 같더라고요.

  물론 일정이 3박 4일 이상이라면 굳이 무리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라면 3박 4일이라 하더라도 하루에 시라타니운스이쿄와 조몬스기를 다 보고, 다른 하루는 섬의 남쪽을 여행하겠어요. 이번 야쿠시마 여행에서 가장 아쉬운 것은 섬의 남쪽을 하나도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갈 날이 있기를 바랍니다. 


다시 미야노우라로 : 우체국 ATM에서 현금 찾기

  시라타니운스이쿄 입구에서 다시 미야노우라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습니다. 애매한 시간에 하산해버려서 약 한 시간을 기다릴 처지였는데, 성수기라서 증편된 버스가 곧 나타나더라고요. 땀에 너무 쩔어서 옆에 앉은 분에게 약간 미안할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무슨 정신인지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가서 소금기 때문에 흰 무늬가 장난 아니었습니다. 약간 쓰레기가 된 느낌으로 눈치를 보면서 꾸역꾸역 탔습니다.  

  숙소가 있는 우시토코 공원을 지나쳐서 미야노우라 읍내(?)까지 왔습니다. 우체국에 가서 돈을 뽑기 위해서지요. 일본 현금 카드를 갖고 계신 분이 아니라면 아마도 이 우체국이 미야노우라 방면에서 (어쩌면 야쿠시마 전체에서) 현금을 조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일 것 같습니다. 야쿠시마에는 세븐일레븐도 없거든요. ATM이 PIN번호를 물어서 약간 당황했지만, 한국에서 쓰던 비밀번호에 00을 붙이니까 인출이 되더군요. 어차피 제 돈을 제가 뽑은 거지만 갑자기 부자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현금 부족 때문에 맥주 한 캔도 계산을 해서 사야할 상황이었거든요. 

  돈을 뽑아서 센노이에로 다시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9시간을 넘게 걸었는데 (돈이 생겨서인가) 몸이 가볍더군요. 참고로 저는 처음부터 야쿠시마에서 렌트카를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운전이 미숙한 편이고, 특히 일본은 운전석 위치도 달라서 도저히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차까지 빌려서 어딜 그렇게 빨리 쏘다닐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해서 그냥 안 빌렸어요. 그리고 성수기라서 빌리려고 해도 차가 없었을 겁니다. 어쨌든 센노이에로 계속 걷다가 중간에 있는 A-COOP에서 장을 보았어요. 너무 거지꼴이라서 약간 눈치도 보였지만 현금도 생겼겠다 저녁에 먹을 것을 푸짐하게 샀습니다.


다시 센노이에

  거지꼴로 다시 센노이에에 들어서니 직원 분께서 재미있었냐며 반갑게 맞아주셨습니다. 사실 아까 버스를 타고 숙소를 지나칠 때, 직원 분이 우연히 밖에 나와있다가 저를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막 흔드셨었거든요. 아까 버스 타고 가고 있는 절 봤다면서 ㅋㅋㅋ하시더라고요. 너무 팔을 격하게 흔드셔서 저는 저게 팔운동을 하고 있는 건지 제게 인사를 하는 건지 약간 헷갈렸는데 제게 인사를 했던 것으로 판명됐습니다.^^ 목욕 시간을 물으시길래 저녁 7시 30분쯤 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무슨 정신나간 생각인지 모르겠으나 또 시라타니 강에 수영을 하러 갔습니다. 지금의 이 노곤함을 안고 강물에 둥실둥실 떠 있으면 기분이 좋을 것 같더라고요. 산토리의 무알콜맥주인 올-프리 한 캔을 들고 (음주 수영 다메!) 쫄래쫄래 시라타니 강에 갔습니다. 아무도 없더라고요. 이쯤되니 나한테 무슨 자석이 있어서 척력으로 사람들을 밀어내나 뭐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또 신나게 수영을 했습니다. 하루종일 찌든 땀을 시원한 강물에 씻어내니 오래 전 광고처럼 '나는 자연인이다!' 라고 외치고 싶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하마터면 수영복을 벗어던질 뻔 했지만 교양인답게 잘 참고 바위에 널부러져서 올-프리를 마셨습니다. 무알콜 맥주치고는 꽤 맛있었습니다. 하긴 뭔들 안 맛있겠어요 이런 상황에.

  하루 종일 산을 타고 또 수영을 했는데도 별로 피곤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스트레스가 없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우리 모두가 그러하듯 저도 꽤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몸뚱이를 사용하는 강도로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단 반나절의 근무로도 녹초가 될 때가 많거든요. 오늘은 정신적인 스트레스 없이 순수한 자유의지로 몸뚱이를 썼습니다. 이렇게 기분 좋게 체력을 탕진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센노이에로 돌아와 목욕을 했습니다. 전날과 달리 해가 다 졌고 그만큼 날씨도 선선해서 탕 속이 더 기분 좋았습니다. 혹사 당한 무릎이며 허리가 뜨끈뜨끈 해지는 느낌에 '크어ㅡ'라는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더군요. 목욕을 시원하게 했으니 이제 마실 차례입니다.


(이날 저녁 식사. 저 잔은 가고시마의 '사사쿠라'에서 받은 그것입니다. 원래 소주잔이지만...)

   

  아까 A-COOP에서 사온 것들로 먹고 마셨습니다. 교자와 가라아게도 좋았지만, 저 회가 정말 맛있었습니다. 특히 우측 상단에 은색 껍질이 붙은 하얀 회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맛있더군요. 부드럽다기보다는 약간 '설컹설컹'하다는 말이 생각날 정도로 단단한 식감이었어요. 표현은 못하겠지만 정말 제가 먹어본 회중에 최고로 맛있었습니다. 나중에 가고시마의 야타이무라에 갔을 때, 요리사분께 이 회가 뭐냐고 사진을 보여드리며 여쭤봤는데 '사바'라고 하셨어요. 이 '사바'가 제가 아는 그 '고등어'가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고등어회는 초회만 먹어봤는데 그건 굉장히 부드러운 식감이었거든요. 초절임을 하기 전에는 저런 맛인 걸까요? 그렇다면 대체 초절임은 왜 하는 거죠? 저 회가 뭔지, 서울에서는 어느 가게에서 어느 계절에 먹을 수 있는지 아시는 분께서는 댓글 좀 달아주세요.

    

 먹고 마시고 책도 읽으며 밤이 깊었습니다. 흔히 '프랙털'이라고 부르는 어떤 기하학적인 구조처럼, 오늘 하루의 무늬 안에 삶 전체의 무늬가 새겨져 있는 것이라면, 이제 스스로 관 뚜껑을 닫아야 할 시간입니다. 오늘은 몇 개의 고개를 넘었고, 땀을 흘렸고, 사과를 먹었고, 물장구를 쳤고, 술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그것들 모두가 아무 대화도 없이 지나갔습니다. 센노이에에서 새로 준비해준 새하얀 이불이 어째서 수의처럼 보였을까요. 

  이불을 덮으니 시라타니운스이쿄며 조몬스기가 이미 과거가 되었다는 것이 실감났습니다. 내일 아침이면 센노이에도 야쿠시마도 다 과거가 된다는 생각을 하니 아쉬웠습니다. 게다가 '그래 거기서 그랬었지'라고 같이 추억을 나눌 사람도 없을 테니 더 아쉬웠습니다. '아쉬운데 더 마셔야지!'라고 같이 헛짓거리를 해볼 사람도 없으니 아쉬워도 도리가 없었습니다. 돌아가면 여행기라도 쓰자-라고 생각하다, 금방 잠들었습니다.








          

 


Posted by (운영중지)



가고시마에서 야쿠시마로

 과연 배를 탈 수 있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준비를 서둘렀습니다. 아침 6시 50분에 터미널에 도착했습니다. 티켓팅이 시작되기 20분 전이었는데 이미 오십여 분 정도는 줄을 서 있었습니다. 줄이 하나가 아니라 셋이었는데 각각이 무엇이 다른지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승선신고서를 써서 들고 눈치껏 줄 하나에 붙었습니다. 승선신고서에는 이름, 성별, 나이, 행선지 등을 간략하게 적게 되어있습니다. 잠시 후 터미널 직원분이 돌아다니면서 승선신고서를 작성해두라는 안내를 했는데, 제 앞에 서있던 서양 형님에게도 뭐라고 뭐라고 하시더군요. 서양 형님은 '하나도 못 알아들었지만 일단 움직여보자'라는 얼굴로 다른 줄로 가서 섰습니다. 그리고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저를 보고 어깨를 으쓱하고 다시 돌아오더군요. 알쏭달쏭 답답 얼굴을 하길래 제가 말했습니다.

 "아까 그 분은 저기에 연필이 있다고 말한 거야."

 "(아하 표정) 워우! 그랬구나. 그럼 이 줄이 야쿠시마 줄은 맞는 거야?"

 "확신은 못 해. 나도 여행자거든."

 왠지 동병상련의 느낌이었습니다. 그렇게 두 사내가 멀뚱멀뚱 서있다가 티켓팅이 시작되었습니다. 다른 줄에 서있던 여성 분이 먼저 티켓 구매에 성공한 뒤에 제 앞의 서양 형님에게 오더군요. 그렇습니다. 그는 동행이 있었던 것이지요. 형님은 '먼저 간다'라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고 사라졌습니다. 다시는 동병상련의 감정을 함부로 갖지 않으리, 생각했습니다.

 티켓은 5,100엔입니다. 티켓을 구매하고도 승선 시간까지는 한 시간 이상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왠지 다들 서둘러 탑승하는 분위기더군요. 어차피 다섯 시간이나 가야하는데 왜들 이렇게 빨리 타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저는 쫄보니까 따라서 서둘러 탔습니다. 승선장으로 나가니 어마어마하게 큰 배가 보이더군요. 


페리 야쿠시마

 배를 타니 왜 다들 서둘렀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이 배에는 좌석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것이죠. 이 커다란 배에는 승객을 위한 좌식 객실이 몇 개 있으며, 쇼파가 있는 라운지 형태의 공간도 있고, 극장(상영은 안 하는 것 같지만) 같은 형태의 공간도 있습니다. 이런 다양한 공간 중에서 편한 곳에 자리를 잡으려면 빨리 타야했던 것입니다. 저는 꽤나 일찍 탄 편이기 때문에 선택의 폭이 꽤 넓었습니다. 일단 홀에 있는 코인락커에 배낭을 집어 넣은 뒤 한바퀴를 슥 돌아보았습니다. 좌식 객실이 가장 인기가 높아서 사람들이 제일 먼저 찼더군요. 저는 쇼파와 테이블이 있는 라운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때만 해도 제가 얼마나 좋은 자리를 잡았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중에 배의 복도고 계단이고 아무데나 자리를 펴고 드러누운 사람들이 가득한 것을 보고서 빨리 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타본 적은 없지만) 피난선이란 것이 이런 꼴이 아닐까 할 정도였습니다. 그 질서의식 뛰어난 일본인들이 여기저기 드러누운 모습을 보니 조금 이색적이더군요. 배 안에는 음료와 간식 자판기가 있으며,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는 곳도 있어서 배고프실 걱정은 안하셔도 됩니다. 야외로 개방된 흡연실도 있으며, 오락실도 있습니다. 배 안을 탐색하고, 책을 조금 읽다보니 뱃고동 소리가 우렁차게 들렸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배가 움직이더군요. 바다로 나가는 것입니다.

(야쿠시마로 가는 바다. 다섯 시간 동안 계속됩니다.)

 

 

바다

 이때부터의 다섯 시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커다란 쇳덩이에 올라 타서, 아직 가본 적이 없는 어떤 섬을 향해, 엄숙할 만큼 파란 바다를 가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의미를 묻는 질문 자체가 초라해지는 것은 아닐까요. 이걸 고독이라고 해야 할까요 동경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감탄이나 황홀 같은 단어를 써야 할까요. 저는 왠지 '정직'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바다가 주는 이 정직한 감각을 저는 너무나 좋아합니다. 가족, 친구, 학위, 직업, 통장 잔고와 임대차 계약서 같은 것은 저를 필요 이상으로 고평가하는가 하면, 또 어떤 때는 기대 이하로 저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바다를 마주하고 있으면 그냥 딱 저를 저인 만큼만 감각할 수 있다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살갗도 있고 팔다리도 있는 그런 인간. 이렇게 정직한 풍경을 앞에 두고 옆에 있는 다른 한 인간에게 사랑을 말하는 것은 얼마만큼의 용기를 요구할까요? 물론 전 고민할 필요가 없이 혼자였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외로움이라고 해도 제 작은 방 안에서 느끼는 것보다는 훨씬 명료한 것이었습니다. 명료하다면, 참을 만합니다. 이 육중한 배는 정직하게 자기를 밀었고, 저도 정직하게 혼자였습니다. 


('에메랄드빛'처럼 무슨 다른 것의 빛깔이 아니었습니다. 그야말로 정직한 파란 바다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섯 시간 입니다.)


(다섯 시간이라고요.)


(다섯... 야쿠시마가 보입니다.)


(천천히 항구로 들어갑니다. 누가 기다리는 매표소에 가기 위해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처럼 설렜습니다.)


(물론 저를 기다리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핫핫)



야쿠시마 (미야노우라)

 배에서 내리니 탁 트인 미야노우라 항구가 보였습니다. 날씨는 무척 맑았습니다. 가장 먼저 다네가시마로 가는 배를 알아봤습니다. 야쿠시마도 페리 터미널과 고속선 터미널이 따로 있는데, 저는 페리 터미널로 갔습니다. 야쿠시마와 다네가시마는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아서, 페리를 타도 1시간 5분이면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죠. 페리 터미널에 가서 창구 직원분께 여쭤보니, 다네가시마로 가는 페리는 '페리 타이요' 하나가 있고, 짝수일에는 오후 1시에, 홀수일에는 오전 9시에 출발한다고 하더군요. 저는 홀수일인 8월 13일에 간다고 하니, 그럼 오전 8시 30분쯤까지 와서 티켓을 사면 된다고, 예약은 필요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페리는 결국 타지 않게 됩니다. 나중에 다네가시마 편에서 적겠습니다.)

 페리 터미널을 나와 마을 쪽으로 걸었습니다. 항구를 벗어나자마자 인포메이션 센터가 있더군요. 일단 가봤습니다. 거기서 한국어로 된 야쿠시마 팜플렛과 영어로 된 지도, 버스 시간표 따위를 좀 챙겼습니다. 옆에서 다른 여행객들이 안내원과 하는 대화를 들으니 섬 안에 있는 모든 렌트카와 스쿠터 따위가 동이 난 것 같았습니다. 상당한 성수기에 왔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획득한 여행 정보지를 잠시 보는데 반가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성수기라서 버스 운행도 증편되어 있더군요. 저는 시라타니운스이쿄와 조몬스기를 하루에 볼 셈이었는데 가장 큰 고민이 시라타니운스이쿄 입구까지 오고 갈 이동수단이었거든요. 버스가 증편된 덕분에 무리없이 이동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인포메이션 센터를 나와 숙소까지 걷기로 했습니다. 날씨가 좀 더웠고, 짐이 무거웠지만 가능하면 천천히 야쿠시마의 첫 인상을 받고 싶었습니다. 야쿠시마는 생각보다 더 한적한 곳이었습니다. 제주도처럼 번화한 관광지를 생각하시면 안될 것 같습니다. 도로에 차도 거의 없고, 가게도 별로 없지만, 그마저도 문을 닫은 곳이 훨씬 많습니다. 그렇게 조금을 걸으니 바다로 들어가는 강이 나오고, 몇 채의 집과 낡은 돌다리가 어우러진 멋진 풍경이 나왔습니다. 

(대략 이런 느낌의 한적한 동네입니다.)


 특별할 것은 없었지만 이 한적하고 고즈넉한 인상이 굉장히 좋았습니다. '앗, 야쿠시마, 대박일 것 같아.'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달밤에 함께 당고를 나눠먹으며 산책을 하는 것은 어떨까요? 그러다가 조용하게 타들어가는 불꽃놀이를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앗 뜨거'하고 불꽃을 놓칠 때 걱정하는 척하면서 슬쩍 손을 잡는 것은? 아무리 더워도 망상은 할 수 있더군요. 일단은 계속 걸었습니다. 조금 걷다보니 A-COOP이라는 대형마트도 하나 나오고, '길을 잃은 건가'싶을 정도로 썰렁한 도로변도 걷고, 그러다가 '이거 걸어갈 만한 거리가 아니었네' 싶을 때쯤 제가 예약해 둔 숙소인 'Sen no i e'(이하 센노이에)가 나왔습니다.


센노이에

 결론부터 말하면 이 숙소는 '짱짱맨'입니다. 엄지손가락이 두 개밖에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이 숙소를 알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잠시 했을 정도입니다. 숨겨놓고서 나만 일 년에 한번씩 슬쩍 방문하고 싶은 그런 곳입니다. 

(센노이에의 입구.)


 제가 센노이에에 도착한 것은 오후 두 시쯤입니다. 너무 조용해서 사람이 있나 없나, 프론트는 어디인가 어슬렁하고 있으려니 직원 분이 나타나서 굉장히 반가운 얼굴로 '킴상'이냐고 묻더군요. 그렇다고 하니 어서 오시라며 프론트 기능을 하는 건물로 안내해줬습니다. 굉장히 고풍스러운 나무향이 가득 나더군요. 안에는 스페인어권에서 온 것 같은 커플이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잠시 위축되었지만 직원 분의 폭풍 친절에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일단 시원한 녹차와 특산품이라는 쿠키(약간 달달하면서 계피향 같은 것이 났는데 뭔지는 모르겠습니다.)를 제공해주셨습니다. 또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리고 '방이 아직 준비가 덜 되어서 네 시쯤 체크인이 가능할 것 같다, 하지만 짐은 맡아주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엥? 네 시? 약간 의아했지만 재촉은 소인배나 하는 거니까 별 생각없이 넘겼습니다. 

 센노이에는 삼십대 초반쯤으로 추정되는 젊은 부부가 거주하면서 운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부부라고 제 마음대로 착각했을 수도 있음.) 약간의 영어가 가능하지만, 언어 능력보다도 최선을 다해서 의사소통해오는 그 친절이 정말 굉장합니다. 아고다의 이용 후기에 'Incredible'하게 친절하다는 후기가 꽤 있었는데 무슨 뜻인지 대번에 알겠더군요. 

 일단 제게 오늘의 계획은 뭐냐며, 필요한 것은 없는지 물어왔습니다. 저는 오늘은 별 활동 없이 쉴 예정이며,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것은 내일 등산에 필요한 신발을 빌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직원 분들끼리 뭔가를 논의하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해줬습니다. 등산장비 렌탈샵인데, 이곳으로 절 픽업하러 올 거라고 합니다. 에? 신발 하나 빌리는데 픽업을 온다고요? 

 잠시 대기하니까 정말로 할아버지 한 분이 차를 몰고 왔습니다. 그의 차를 타고 근처에 있는 샵(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창고에 가까운)에 가서 이런 저런 등산화를 신어보고 잘 맞는 하나를 빌렸습니다. 2박 3일까지는 1,000엔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더 비쌀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흔쾌히 지불했습니다. 이게 야쿠시마 시세에 비추어 비싼지 아닌지는 생각도 안했습니다. 돈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저는 늘 주관적으로 판단하거든요. 가고시마에선 술 처먹는 데에도 5,000엔씩 태웠는데 등산화 2박 3일에 1,000엔이라니, 이걸 고민하는 거야말로 시간 '낭비'겠지요. 게다가 픽업 서비스까지 해준다니 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등산화 안 사오길 정말 잘했다 생각했습니다. 빌리고 난 뒤에는 다시 센노이에로 태워다주셨고, 반납은 그냥 센노이에에 하면 직접 찾아가신다고 했습니다. 아름답죠?

 센노이에로 돌아오니 또 궁금한 것은 없냐고 합니다. 내일 버스 시간표를 꺼내며 이게 맞는지 확인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시라타니운스이쿄로 가는 첫 버스가 오전 5시에 출발하는 것이 맞냐고 하니 또 여기저기 전화를 거셔서 확인하시더니 맞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정류장은 '우시토코 공원'이며, 그 정류장에는 5시 7분에 정차할 예정이라는 것도 알려주시더군요. 이렇게 쫄보인 저를 안심시켜 주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제가 가장 가까운 수영 스팟은 어디냐고 물었습니다. 센노이에 안에 있는 길을 통해 바로 옆에 있는 계곡으로 가도 되고, 아니면 계곡을 따라 조금 걸으면 더 넓은 강이 나온다고 하더군요. 그리고선 다른 직원 분까지 불러서 '무슨 바다는 어떨까?', '거기는 조금 멀지 않을까?' (물론 저의 추정) 이러면서 마구 논의를 하시더군요. 왠지 황송해져서 '그냥 여기로도 이이데쓰^^' 하니까 웃으면서 알겠다고 하시더군요. 자기는 조금 걸어서 강으로 가는 걸 추천한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방으로 안내해주셨습니다. 제가 얘기하지도 않았는데 '수영하시려면 옷을 갈아입으셔야 하니까 방으로 가시죠!' 하더군요.(물론 저의 추정) 네 시까지는 한 시간 이상 남았는데 체크인 할 수 있는거냐고 하니까, 파이널 체크를 해야겠지만 지금도 문제는 없다고 하시더군요. 

 센노이에는 모든 객실이 독채로 이루어진 일종의 펜션(?)입니다. 이런 숙박 형태를 일본에서는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저는 아담한 오두막 하나를 통째로 썼는데, 외부의 시선에서 자유롭게 나무로 잘 둘러싸여 있어서 굉장히 오붓한 느낌이었습니다. 방에 들어서니 역시 고풍스러운 나무향이 가득했고, 바닥에는 다다미가 깔려있었습니다. 제 짐이 잘 모셔져 있더군요. 먼지 한 톨 보이지 않았는데 대체 뭘 더 점검한다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원 분께선 방에 비치되어 있는 것들을 친절히 안내해주시고 '천천히 다녀오시라'며 떠났습니다. (목욕을 몇 시쯤 준비하면 될지도 묻더군요. 호오?)  

(대략 이런 느낌의 독채. 툇마루?도 있고, 검은 슬라이드 도어를 열면 창문입니다.) 


(안쪽에서 보면 이러한 느낌. 짐도 풀고 빨래도 널었더니 좀 너저분.) 


시라타니

 물놀이 옷으로 갈아입고 룰루랄라 걸었습니다. 센노이에에서 도보로 2~3분 정도면 시라타니강에 갈 수 있습니다. 야외 수영은 언제나 즐겁지만, 딱 좋은 스팟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짠물이냐 아니냐, 너무 얕거나 너무 깊은가, 파도나 물살이 너무 거세지는 않은가 이런 것들이 늘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늘 '그래. 수영 자체를 위해서는 실내수영장이 짱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라타니강은 상당히 적절한 수영 환경이었습니다. 강이니까 물도 안 짜고, 적당히 깊지만 빠져 죽을 정도는 아니고, 그러면서 햇살은 고스란히 느낄 수 있고, 사람도 없고, 더 이상 뭘 바랄까요. 특별히 절경은 아니지만 유유자적 헤엄치기에는 딱이었습니다.

(대략 이런 느낌. 얕아보이지만 어떤 부분은 꽤 도전적인 깊이였습니다.)


 일본인 가족이 한 두 그룹 있었지만 곧 떠나고 저는 이 물놀이 스팟을 고스란히 혼자서 차지했습니다. 물이 굉장히 맑아서, 물 속으로 들어가면 민물고기들이 손에 잡힐 듯이 보였습니다. 마음껏 헤엄을 쳤습니다. 헤엄을 치다가 그늘진 바위에 앉아서 과일과 무알콜 맥주를 먹는 것은 어떨까요.(음주 수영은 안됨.) 함께 하는 이의 젖은 머리 위에서 조각 조각으로 흩어지는 햇살을 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러다가 물에 풍덩 빠뜨리기도 하고, 나는 분명 물을 튀겼는데 역설적으로 불꽃이 일고... 강에서도 망상은 멈추지 않더군요. 물론 전 혼자였으니까 그냥 전지훈련 모드로 수영을 열심히 했습니다. 몸이 나른해질 때까지. 


다시 센노이에

 젖은 몸으로 길을 걸어 센노이에로 돌아왔습니다. 해가 적당히 누그러져서 기분 좋게 몸을 말릴 수 있었습니다. 센노이에 도착하니 6시쯤 된 것 같습니다. 씻을 차례입니다. 센노이에의 욕실은 독채와 분리되어 있는데, '고에몬부로'라는 일본의 전통 욕조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땔감을 부뚜막 같은 곳에 집어넣어 불을 피우고, 그 열로 가마솥 같은 것을 데우고, 그 가마솥에 사람이 들어가는 형태입니다. 가마솥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가 없네요. 아무튼 이 목욕을 준비하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물놀이 가기 전에 말해뒀던 터라 금방 이용할 수가 있었습니다. 

 아고다에 욕실은 공용이라고 되어있어서 여러 사람이 같이 이용하는 꼴인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닙니다. 딱 한 사람을 위한 욕실이 별채로 존재합니다. 정말 아담하더군요. 현대식 샤워기도 설치되어 있어서, 샤워를 하고 솥(?)에 들어갔습니다. 적당히 외부의 시선을 차단하되, 하늘을 볼 수 있는 창이 있어서, 솥에 몸을 담그고, 풀벌레들의 소리를 들으면서 피로를 좀 풀었습니다. 물이 뜨끈뜨끈합니다. 겨울이라면 정말 짱짱맨일 것 같습니다. 연인이랑 같이 오면 2인용 솥을 주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차피 지금은 해봤자 쓸쓸한 생각이니까 관뒀습니다.   

 욕실이 별채라는 점은 약간 불편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방 안에 꽤 큰 세면대가 있기 때문에 세수나 면도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만, 샤워는 할 수 없으니까요. 직원분께 여쭤봤더니 그냥 샤워만 하고 싶을 때는 이 별채를 언제든 이용하라고 하시면서 샤워기 온수 켜는 법을 알려주셨습니다. 방과 욕실은 불과 십여 미터 정도지만 어쨌든 옷을 다 벗고 왔다갔다 할 수는 없다는 것을 고려하셔야 합니다. 저야 뭐 밤 늦게 씻을 일이 없는 처지니까 큰 불편은 없었습니다. 

 목욕을 마치고 나오니 직원 분께서 '마트에 갈 거면 데려다주겠다'라고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저는 '매우 감사하다. 그런데 일단 ATM에 가서 돈을 뽑아야 할 것 같다' 라고 했습니다. 사실 제가 센노이에는 숙박비를 현금으로 현장 결제해야 한다는 것(이곳의 거의 유일한 단점)을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현금을 준비할 때 이걸 고려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먹고 마실 현금이 좀 아슬아슬한 상황이었습니다. 직원 분께선 '오늘은 공휴일이라 이미 문을 닫았을 것이다. 그리고 평소에도 6시면 닫는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카드를 이용할 수 있는 마트가 하나 있다. 그곳으로 데려다주겠다'라고 했습니다. 아니 원래 일본의 숙소에서는 이런 정신나간 친절을 베푸나요? 저는 기쁜 마음으로 그의 차를 타고 마트로 향했습니다. 걸어서는 약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곳이었습니다.(비교적 가까운 마트인 A-COOP은 카드가 안됩니다.)

 마트에 도착하자 그는 '나도 뭘 좀 살 테니 천천히 장을 보라'고 했습니다. 저는 마트를 돌며 식량과 주류를 쓸어 담기 시작했습니다. 야쿠시마를 떠날 때까지 먹고 마실 것을 충분히 샀습니다. 중간에도 제가 좀 헤매니까 센노이에의 직원 분께서 나타나 무엇을 찾냐며, 그건 저기에 있다며 도와줬습니다. 대체 이 분들은 어디까지 친절한 걸까요?   

 (저 회는 야쿠시마산입니다.)


 고독한 대식가답게 와구와구 잘도 먹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만난 웬만한 마트에서는 다 저렇게 소포장된 회를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다는 것이 굉장히 좋았습니다. 특히 야쿠시마에서는 야쿠시마에서 잡은 해산물을 팔고 있더군요. 저게 380엔입니다. 대체 5,000원도 안되는 돈에 1인분의 회를 살 수 있는 곳은 어디에 있나요? 만약 서울의 제 방 근처에서 저런 것을 살 수 있다면 저는 '가볍게 한 잔 하고 싶은데 치킨이나 족발을 시킬 순 없고...' 따위의 고민은 전혀 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센노이에의 방 안에는 전자렌지도 있고 커피포트도 있기 때문에 마트 음식을 편하게 조리할 수 있었습니다. 마트 음식일 뿐이지만 전날 가고시마에서 먹은 것 못지 않게 맛있게 먹었습니다. 

 센노이에에서 숙박을 하실 예정이시라면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먹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근처에는 식당 따위가 전혀 없습니다. 차를 렌트하셨다면 항구 쪽으로 나가서 먹을 곳이 있을 것도 같습니다만 확신은 못하겠습니다. 다만 센노이에에서는 일본식 바베큐(아마도 우리가 '풍로'라고 부르는 그것?) 설비를 대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경우에도 구워 먹을 식자재는 직접 마트에서 준비해야 한다고 하니,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아니면 저처럼 마트 음식을 사다가 드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것도 충분히 맛있습니다. 


 저렇게 먹고 마시고, <우미인초>도 좀 읽었습니다. 눕기 전에 잠시 방 밖으로 나와보았습니다. 센노이에는 야쿠시마에서도 읍내(?)가 아니라 산 밑자락에 있는 꼴이기 때문에 주변이 정말 깜깜하고 조용합니다. 하늘을 봤는데 별이 정말 엄청났습니다. 솔직히 그동안 별 같은 것에 감탄한 적이 없었습니다. 대학 시절 가평 같은 곳에 엠티를 가더라도 애들이 '우와 별 봐' 할 때 저는 심드렁한 편에 속했습니다. 그런데 이날 밤에 본 별들은 진짜였습니다. 별이 많았다기보다는 아예 다른 종류의 밤하늘이라고 말하는 게 더 맞을까요. 사진으로 남겨보려고 노력했지만 좀처럼 찍히지가 않았습니다. 지금 이 광경을 나 혼자만 본다는 것이 아까울 정도였습니다. 제 생각에 이것이 혼자하는 여행의 가장 큰 슬픔입니다. '지금 여기'를 오직 혼자서만 감각해야 한다는 것. 아무도 지금 이 느낌을 증언해줄 수 없다는 것. 황홀할수록 더 안타까워지는 역설입니다. 저렇게 별이 빛나는 하늘을 머리 위에 두고, 툇마루에서 모기향을 피워놓은 채 오랜 시간을 함께 한 부인과 맑은 술을 나누는 것은 어떨까요? 그건 제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순간에 가깝습니다. 물론 아직은 불가능합니다. '아직'이란 단어는 참 야속합니다. 

(1인분의 침구는 굉장히 깨끗하고 포근했습니다. 

내일은 5시에 나가서 12시간 동안 혼자 걸어야 하므로, 일찍 잠을 청했습니다.)







     

 

Posted by (운영중지)



출국

 아침 9시 20분 대한항공 편이었습니다. 출국 경험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쫄보처럼 상당히 일찍 도착했습니다. 심지어 모바일 체크인을 마친 상황이었고, 백팩 하나만 메고 가서 위탁수하물도 없었습니다. 도넛을 하나 먹고,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했습니다. 공항에 오면 늘 <러브 액츄얼리>의 첫 장면이 생각납니다. 공항에서 반갑게 재회해 포옹하는 사람들의 몽타쥬 위로,  '세상 돌아가는 모양새 때문에 우울할 땐, 난 히드로 공항의 도착 게이트를 생각한다' 라는 나레이션이 깔리는 장면이죠. 가고시마 도착 게이트에 누가 절 기다리고 있진 않았습니다. 물론 인천으로 돌아왔을 때에도 아무도 기다리고 있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상기된 얼굴로 이곳 저곳을 오가고, 서로 손을 흔드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것은 기분 좋은 일입니다. 만약 세상에 저런 아름다움이 있다면, 아마 언젠가 제 차례가 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가고시마 행 비행기는 어째서인지 빈 자리가 많았습니다. 어딘가의 인문진흥원에서 단체로 가고시마 탐방을 가시는지 목에 명찰을 건 분들이 많이 계시더군요. 제 옆자리는 빈 자리였습니다. '가고시마엔 처음 가세요? 저도예요.' 같은 대화는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옆에 누가 앉았어도 그런 대화는 못했을 겁니다. 저의 사교성을 시험할 만한 기회가 오지 않은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쨌든 그냥 1시간 30여분 동안 편하게 비행했습니다. 간식으로 크루아상, 요거트, 약간의 과일이 제공되었습니다. 간식을 먹고 책을 읽었습니다. 이번 여행에는 읽으려고 사뒀던 나쓰메 소세키의 <우미인초>를 들고 갔습니다. 왠지 일본 소설을 가져가야겠다 싶었습니다. 물론 <우미인초>는 가고시마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그 이야기의 배경은 교토와 도쿄입니다. 이 소설은 고노와 무네치카, 오노라는 세 명의 남성, 후지오, 이토코, 사요코라는 세 명의 여성이 등장하는 일종의 애정 소설입니다. 이 여섯 사람이 다 등장하기도 전에 비행기는 가고시마에 착륙했습니다. 


가고시마 공항에서 가고시마중앙역으로

 입국 수속은 간단하게 끝났습니다. 가고시마 공항은 상당히 작고 한적한 공항이었습니다. 일단 자판기에서 커피 한 캔을 뽑아 마시고 대충 공항을 한 바퀴 돌아봤습니다. 온천이 유명한 곳이니만큼 공항 바깥에도 무료 족욕 코너가 있더군요. 날씨가 굉장히 더워서 발을 담글 마음은 들지 않았습니다. 야자수 같은 것이 서있는 것이 남쪽에 왔다는 느낌이 확 들더군요. 일단 가고시마중앙역(가고시마츄오에키)로 이동하기 위해 버스 정류장을 찾았습니다. 티켓은 자동판매기로 구매할 수 있는데, 목적지에 따른 금액이 판매기 위의 안내판에 적혀 있습니다. 가고시마중앙역까지는 1250엔이더군요. 돈을 넣고, 판매기에 '1250'이라는 숫자를 누르면 1250엔짜리 표가 나옵니다. 별 것도 아닌 일인데 괜히 뿌듯하더군요. '오예! 나 일본에서 버스티켓을 샀다고!' 정도의 성취감이었습니다. 판매기 바로 뒤에 버스가 왔습니다. 직원 유니폼을 입은 분께 '코레 가고시마츄오에키니?' 하고 더듬더듬 여쭤보니 매우 친절하게 그렇다고 대답해주셨습니다. 

 버스는 한적한 길을 30여분 정도는 달립니다. 달리는 동안은 좌석마다 비치되어 있는 관광 홍보문을 살펴보았습니다. 가고시마중앙역 근처의 맛집 지도 따위가 있더군요. 물론 거의 읽지 못하기 때문에 크게 도움은 안됐지만, 이국의 인쇄물을 보는 것 자체가 꽤 흥미로운 일이었습니다. 곧 시내로 진입하는데, 차창 밖으로 지나치는 건물과 행인들로부터 처음으로 받은 인상은 상당히 차분하고 소박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대도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상당히 정감이 가는 풍경이었습니다. (물론 나중에 간 덴몬칸 근처는 규모가 상당했습니다.)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는데, 곧 가고시마츄오에키마에-라는 안내가 들렸습니다. 창밖으로 역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건물도 보이더군요. 내렸습니다.

(사진 : 왼쪽의 어두운 색 건물이 가고시마중앙역 건물, 오른쪽의 큰 건물은 백화점인 아뮤플라자입니다.)


가고시마중앙역

 가고시마중앙역 인근은 역시 꽤 번화한 곳이었습니다. 알고는 있었지만 노면전차가 다니는 풍경이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생각해보니 노면전차를 실제로 본 것이 이번이 처음입니다. 뭔가 고풍스러운 인상이라 좋았습니다. 가고시마중앙역에서 일단 두 가지 미션을 해결한 뒤에 점심을 먹기로 했습니다. 역에 코인락커가 있더군요. 300엔을 넣고 백팩을 집어 넣었습니다.

 먼저 출국편을 위해 후쿠오카로 갈 신칸센 티켓을 사러 갔습니다. 신칸센 티켓 판매소에서 시간표를 보는 방법을 이해하지 못해서 약간 애를 먹었으나, 더듬더듬 일본어를 해서 표를 구매할 수 있었습니다. 10,000엔이 약간 넘는 금액이었던 것 같습니다. 많은 일본 여행객분들이 무슨무슨 패스를 이용해서 여러 번을 저렴하게 이용하시는 것 같은데, 저는 딱 한번만 타는 거니까 그냥 샀습니다. 신용카드도 되더군요. 이때까진 잘 몰랐는데, 가고시마나 야쿠시마, 다네가시마에서 신용카드 사용은 좀 어려운 느낌이었습니다. 신용카드를 믿고 움직이다간 낭패를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 '웰컴 큐트' 패스를 사러갔습니다. 가고시마중앙역에 있는 여행 인포 데스크에서 1,000엔(1일권)에 구매할 수 있습니다. 이 패스로 하루 동안 가고시마 시내에 있는 시영 버스와 노면 전차, 사쿠라지마 페리, 사쿠라지마 아일랜드뷰 버스 등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외국인 여행객만을 위한 서비스이므로, 구매하실 때는 여권을 제시하셔야 합니다. 데스크에 근무하시는 직원분들이 굉장히 밝고 친절하셔서 기분이 무척 좋았습니다. 아,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일본의 접객! 이라는 생각이 확 들더라고요. 또한 이 인포 데스크 근처에는 다양한 홍보물이 비치되어 있는데, 한국어로 된 가고시마 관광 가이드북도 챙길 수 있습니다. 상당히 알찬 내용이니 챙기시는 걸 권합니다. 참고로 이 책자는 가고시마시의 공식관광 웹사이트(한국어)에서 스캔본을 볼 수도 있습니다.

 점심을 먹을 때가 됐습니다. 과연 가고시마에서의 첫 식사를 무엇으로 해야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흑돼지 돈카츠를 먹어보기로 했습니다. 한국의 블로그에서 많이 이름을 들을 수 있었던 돈카츠 카와히사(川久)를 5분쯤 걸어 찾아가보았는데 4~5팀인가가 대기하고 있더군요. 역시 소문의 맛집인가봅니다. 밖에 서서 기다리기에는 날씨가 너무 더웠고, 이런 바쁜 시간대에 혼자서 식사하는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저는 뭐 그런 성격이라서 그냥 포기했습니다:) 다시 중앙역 안으로 들어와서 식당가에 있는 흑돼지 돈카츠집 오야마(大山)에 갔습니다. 역시 메뉴판을 가리키며 더듬더듬 돈카츠와 생맥주를 주문했습니다. 친절한 종업원 분이 주문을 받아 적고 '비루를 OOOOOOOOO?' 하시는데 이건 저의 예상 범위를 넘어서는 일본어였기 때문에 살짝 당황했습니다. 이건 무슨 얘기지? 맥주 잔을 고르라는 얘기인가? 맥주에 뭘 타겠냐는 얘기인가? 많은 생각이 스쳤습니다. 그러나 마치 알아들은 것처럼 '하이!' 하니까 알겠다고 하고 가시더군요. 몇 번 이 문장을 듣다가 깨달은 것이지만, 이것은 '식사가 나오기 전에 맥주를 먼저 드릴까요?' 라는 말인 것 같습니다 (아직도 확신하진 못함). 일본에서는 으레 이런 질문을 하나보더라고요. 한국에서는 보통 당연한 듯이 맥주를 먼저 주니까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돈카츠는 역시 맛있더군요. 아무거나 잘 주워먹는 편이긴 합니다.


버스를 타고 부두로

 점심을 먹고 버스를 타러 역사 밖으로 나왔습니다. 일단 고속선터미널에 가서 내일 야쿠시마로 갈 고속선을 예약하려고 했습니다. 역사 바로 앞에 버스 플랫폼이 길게 있고, 원하는 방향으로 가는 버스가 몇 번 승차장으로 오는지 확인한 뒤에 그곳에서 대기를 하면 됩니다. 즉, 버스의 번호가 아니라 승차장의 번호를 찾아야 하더군요. 왼쪽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한국어도 표시되어 있기 때문에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잠시 기다리니 버스가 왔습니다. 가고시마의 버스는 뒤로 타서 앞으로 내리는 시스템인데, 올라탈 때 번호표를 뽑으면 운전석 위의 전광판(?)에 해당 번호의 요금이 실시간으로 고지됩니다. 즉, 내릴 때 자기 번호에 해당하는 금액을 동전통에 넣으면 됩니다. 물론 저는 웰컴큐트패스가 있었기 때문에 번호표는 뽑지 않았습니다.

 미아될까봐 귀를 쫑긋하고 있었는데 손님이 하나둘 내리고 어느새 저만 남았습니다. 어찌된 일이지-하고 있자니 기사 아저씨가 버스를 세우고 '고객님 어쩌고저쩌고' 하십니다. 대략 여기가 종점이라는 얘기 같습니다. 


   저   :  저, 죄송하지만 여기 어디입니까?

기사님 :  여기는 OOOOOO(???)입니다. 고객님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저   :  도루핀-포또(돌핀 포트)입니다.

기사님 :  아, 저기 NHK건물 앞에서 오른쪽으로 돌아서 5분 정도 걸으면 됩니다.

   저   :  앗,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물론 실제 대화는 위처럼 매끄럽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아무튼 기사님의 미소와 친절에 다시 한번 감탄하며 내려서 걷기 시작했습니다. 바다가 보이더라고요. 알려주신 대로 NHK 건물 앞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걸으니 곧 돌핀포트가 나왔습니다. 돌핀포트는 바다가 보이는 곳에 위치한 종합 상업 시설이자 시민 휴양 공간입니다. 상당히 길쭉하게 생겼기 때문에 돌핀포트를 지나 고속선터미널까지는 좀 걸어야 했습니다. 해가 무척 뜨거웠고, 백팩은 무거웠지만, 발걸음은 무척 가벼웠습니다. 여행의 첫날이었고, 드디어 바다가 보였으니까요. 바다로 나간다는 생각을 하면 늘 이유없이 기분이 좋습니다. 


야쿠시마로 가는 배 구하기

 고속선터미널로 갔습니다. 왠지 한적하더군요. 창구 직원에게 말을 걸기 전에 심호흡을 했습니다. 한국말도 잘 못하는데 외국말로 티켓을 사야한다니! 크게 마음을 먹고 창구에 가서 '쓰미마생 아시타 아사노 야쿠시마 티케또오 블라블라...' 열심히 준비한 말을 했습니다. 창구 직원 분이 친절한 미소를 곁들여 일본어로 여기는 버스 터미널이니까 옆 창구로 가세요^^ 하더군요.(물론 나의 추정) 하하하. 

(가고시마의 고속선터미널 창구. 저기 저렇게 '고속버스창구'라고 써있는데 왜 전 못봤을까요. 

긴장하지 맙시다.)


 그래서 옆 창구에 가서 다시 똑같은 얘기를 반복했습니다. 옆 창구 직원 분이 심각한 얼굴로 컴퓨터로 뭔가를 조회하시더니 내일은 노 티켓이라고 하더라고요. 하루에 네 편 정도는 있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올 솔드아웃이랍니다. 꽤 당황했습니다. 일본도 성수기니까 좀 빡빡하겠지, 싶어서 일부러 하루 전에 사러 온 건데 전부 매진일 줄이야.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제가 표를 사려한 8월 11일은 일본의 공휴일이라고 합니다.) 

 고속선 외에도 페리가 있다는 정보를 출국 전에 인터넷을 통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체없이 바로 옆에 있는 '남부두터미널'로 향했습니다. 조금 전의 고속선터미널보다 더 한적하더군요; 야쿠시마행 티켓을 파는 창구는 심지어 셔터가 내려져 있었습니다; 그래도 안에 직원분이 계신 것 같아서 스미마생- 하고 인기척을 내니 한 분이 응대를 해주셨습니다. 대략 내일 가려는 표를 사려고 한다. 예약할 수 있냐, 라고 여쭤보니 다음과 같은 정보를 주시더군요.

 첫째, 야쿠시마로 가는 페리는 아침 8시 30분에 출항해서, 12시 30분에 도착하는 것이 하나 있다.

 둘째, 예약은 따로 없고, 티켓은 당일 아침 7시 10분부터 판매한다. 

 제가 제대로 알아들은 것인지 확신이 없었지만 어쨌든 별다른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내가 잘못 알아들었다면? 혹은 내일 내가 너무 늦게 와서 표가 매진된다면? 그럼 내가 예약해놓은 숙소는 어떻게 하지? 꽤 곤란한 기분이 들었지만 별 수 없었습니다. 일이 틀어지면 뭐 틀어지는 대로 놀지 뭐. 하고 그냥 남부두터미널을 빠져나왔습니다. 그리고 멀지 않는 곳에 있는 숙소로 또 걷기 시작했습니다. 걸었다는 단어를 쓰는 것만으로 땀이 나는 것 같습니다.


그린게스트하우스

 가고시마에서는 '그린게스트하우스'란 곳을 미리 아고다에서 예약을 해두었습니다. 고속선터미널과 남부두터미널에서 도심 방향으로 아주 조금만 걸으면 오른쪽 사진과 같은 4층 건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린게스트하우스는 이 건물을 전부 사용하고 있는 곳입니다.

 게스트하우스라는 숙박 형태를 그리 선호하진 않습니다. '안녕? 넌 어디서 왔니?' 라고 인사를 건네며 낯선 여행객들과 교류하는 일을 제가 잘 할 수 없다는 것을 지난 여행에서 깨달았기 때문이죠. 게다가 그것이 영어라면 상당히 피로한 일입니다. 그래도 익숙치 않은 뭔가에 뛰어드는 것이 여행의 재미 중 하나니까 하루 이틀쯤은 게스트하우스에서 지내보자, 라고 결심했습니다. '편하고 싶다'랑 '교류하고 싶다'라는 이중적인 생각 때문에 도미토리는 아니고 2인실이라는 어정쩡한 예약을 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방에 아무도 배정되지 않더라고요. 하하하. 게스트하우스는 어쨌든 깨끗했습니다. 화장실이나 샤워실도 비교적 넉넉하게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기 때문에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 게스트하우스를 나섰습니다.   


사쿠라지마

 NHK를 기준으로 돌핀포트의 반대쪽으로 가면 사쿠라지마 페리 터미널이 있습니다. 게스트하우스에서는 걸어갈 만한 거리입니다. 사쿠라지마로 가는 페리는 매우 자주 있으며, 24시간 운행되기 때문에 편합니다. 다만 사쿠라지마 안에서 운행하는 아일랜드 뷰 버스의 막차가 오후 4시 35분입니다. 저는 이 버스를 노렸기 때문에 조금 서둘러서 페리를 탔습니다. 이 페리도 웰컴큐트 패스로 이용이 가능합니다. 

 사쿠라지마에 도착하면 '허벌나게 반갑소잉'이라는 현수막이 환영해줍니다. 인터넷으로 보긴 했었지만 재밌더군요. 터미널 바깥에 바로 아일랜드뷰 버스 승차장이 있습니다. 관광객은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곧 버스가 도착하더군요. 역시 웰컴큐트 패스를 제시하고 버스에 탔습니다. 버스는 사쿠라지마의 일부를 약 한 시간 동안 돌아보는 코스로 운행합니다. 정차장에 따라 약간의 시간을 주기 때문에 주변을 둘러보거나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가장 긴 시간 동안 정차하는 곳은 유노히라 전망대로, 사쿠라지마의 모습을 가장 잘 담을 수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아일랜드 뷰 버스 막차를 탄 다른 여행객들은 저 말고는 모두 가족 단위였습니다. 꼬맹이 두 명을 데리고 온 중국인 부부, 일본인 부부, 백인 부자 등 유노히라 전망대에서 서로 사진도 찍어주고 이야기도 하는 것을 보니 조금 부럽더군요.


(선착장에 돌아오니 또 다른 페리가 석양을 배경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아일랜드 뷰 버스는 사쿠라지마의 극히 일부만 순환하는 버스입니다. 조금 더 시간이 있으신 분들은 온천 마을에 가시거나, 바다 카약 체험, 섬 일주 페리 등을 고려하실 수 있습니다. 저는 '들른다' 정도의 느낌이었습니다. 사쿠라지마 자체보다는 페리를 타는 게 더 재밌있었습니다. 사실 이 때는 첫날이기 때문에, 자판기에서 음료수 뽑아 먹는 것도 재밌을 때입니다. 


덴몬칸으로

 사쿠라지마에서 돌아와서는 번화가인 덴몬칸으로 이동하려고 했습니다. 먹고 마실 시간이 됐기 때문입니다. 걸어가기는 좀 부담스러울 것 같아서 처음엔 공용 자전거인 '가고린'을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가고린'은 무인 시스템으로 운영되는데, 어째서인지 제 신용카드를 인식하지 못하더군요. 그래서 그냥 포기하고 노면전차를 이용해보기로 했습니다. 덴몬칸까지는 세네 정거장 정도인데, 철컹철컹 가는 것이 상당히 색다른 기분이었습니다. 

 저는 어떤 저녁을 상상했습니다. 해가 아직 밝을 때 퇴근하고 노면전차에 탄 나. 느긋한 마음으로 소설책을 읽기 시작합니다. 소설은 20세기 초반을 배경으로 한 것이면 적절하겠네요. 내릴 역이 되었지만 왠지 계속 읽고 싶은 마음이 들어 내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가 지고 노선을 몇 바퀴 돌 때까지 노면전차의 한 구석에서 책 한 권을 모두 읽고, 뿌듯한 마음으로 내리면 어떨까요. 상당히 기분이 좋아질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러한 상상이 가능했던 이유는 전차 안이 만석임에도 거의 도서관처럼 조용했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답답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이때의 저에게는 무척 고즈넉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소주

 덴몬칸은 상당한 규모의 번화가 였습니다. 이날 밤에는 지역 음식과 함께 소주를 마시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제가 찾으려던 가게는 인터넷에 일부 소개되어 있는 '소주천국'이라는 가게였습니다. 이 글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는데 굉장히 좋아보였거든요. 그런데 덴몬칸의 뒷골목을 몇 번이고 돌아도 도저히 찾을 수 없더군요. 몇 블록을 한 시간 이상 샅샅이 뒤졌지만 결국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가고시마 관광 연맹 홈페이지에서 추천하는 또 다른 가게인 소주바 '사사쿠라'에 갔습니다. 

(사사쿠라의 외관)


 일본에서는 보편적인 형식일지 모르겠으나, 제게 사사쿠라는 상당히 이색적인 느낌을 줬습니다. 전체적인 인테리어는 조금 클래식한 바(BAR)입니다. 테이블보다는 바에 앉아서 마시는 것이 보통이고, 단정한 차림새와 매너의 바텐더 분이 계속 응대를 해줍니다. (그는 훤칠한 키의 젊은 남성이었습니다.) 다만 위스키나 칵테일이 있어야 할 자리에 다양한 소주가 가득합니다. 대략 100여종은 갖추고 있지 않나 합니다. 게다가 음식의 종류도 상당히 많으며, 합리적인 가격에 제대로된 음식을 내놓고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바에서 파는 음식이라면 거품 낀 가격에 맛도 없는 감자튀김, 치즈크래커, 해물떡볶이 따위를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이곳은 그런 걱정을 안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냥 전체적인 무드가 바일 뿐이지, 파는 식음료들은 이자카야에 가까우므로 편하게 먹고 마실 수 있습니다. (게다가 혼자서도!)

 소주는 잔으로 시키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먼저 가장 인기있는 소주를 부탁드렸습니다. 세 가지 음용 방법을 설명해주시더군요. 저는 얼음을 넣어서 먹는 '로꾸'로 요청했습니다. 새삼스럽지만 역시 굉장히 친절하셨습니다. 쉬운 일본어와 영어를 섞어서 이것저것을 소개해주셨습니다. 안주는 일단 가고시마에서 많이들 먹는다는 기비나고(샛줄멸)의 사시미를 주문했습니다. 이걸 시작으로 엄청나게 먹고 마셨습니다. 

(처음 먹은 기비나고의 사시미. 미역으로 추정되는 것과 함께 미소 소스에 찍어 먹으니 무척 맛있었습니다.)


(지역 특산물인 흑돼지로 만든 뭔가를 먹어야지, 해서 시킨 볶음요리. 심플하지만 역시 고기는 맛있습니다.)


(흑돼지 돈코츠. 흑돼지를 미소 소스에 푹 고아낸 것인데, 정말 맛있었습니다.)


 마지막에 먹은 흑돼지(쿠로부타) 돈코츠는 정말 놀랄 만큼 맛있었습니다. 젓가락으로도 쉽게 부셔질 정도로 연해진 고기에 구수하면서도 짭조름한 미소 소스가 흠뻑 배어 있는데 잠깐이지만 '우리나라에서 이거 장사를 해볼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이쯤까지 왔을 때는 소주가 이미 네 잔째였기 때문에 속이 약간 차가웠는데, 그걸 달래주는 '마무리 음식'으로서도 완벽했습니다. 너무 맛있어서 밥 생각이 나더군요. 밥(고항) 있냐고 물으니 옆자리에 앉아 계시던 일본인 남성분이 '재패니즈 T.K.G'를 먹으라고 하더군요. T.K.G는 '타마고 카게 고항'의 이니셜로, 날계란을 얹은 밥을 말한다고 합니다. 물론 시켰습니다. 약간 돼지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먹고 싶은 거 다 먹으려고 온 건데 뭘 참아. 날계란을 올려 주지 않고 직접 깨서 얹도록 따로 주는데, 바텐더 분과 옆 자리 남성분이 자기 아들을 가르치듯 친절하게 알려주셨습니다. 계란을 깬 뒤, 노른자만 올리고, 실파(?)와 가쓰오부시를 조금 얹고, 라유를 조금- 그냥 밥일 뿐인데 꽤 세심한 구성의 물건이 나와버려서 음, 일본은 일본이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날 마신 소주들입니다. 뭘 알아서 시킨 것은 아니고, '가장 인기있는 것', '가장 스탠다드한 것', '바텐더 분이 가장 좋아하는 것' 을 부탁드려서 마셨습니다. 잔으로 마시는 것이지만 병을 앞에 이런 식으로 놓아주기 때문에, 무엇을 마시고 있다는 기분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 것이 '가장 많이들 마시는 저렴한 것'이라는데 왠지 이게 제일 맛있더군요. 입이 싸구려인가 봅니다. 

 마시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가고시마의 이런 소주 문화가 굉장히 부러웠습니다. 상품의 다양성이나 맛이야 그렇다고 치고, 일단 '잔'을 기본 단위로 판매하고 즐기는 것이 좋았습니다. '한 잔'이 상품에 따라 다르지만 300엔쯤부터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 싸게 흠뻑 취할 수 있는 쪽은 우리나라입니다만, 맛있는 음식과 향 좋은 술을 가볍게 즐기고 싶을 때는 이런 일본의 방법도 좋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집 근처에 이런 술집이 있다면 매일 저녁 찾을 것 같습니다. 바텐더 분이 '형님 여기만 오지 말고 데이트도 좀 하세요' 라고 말할 때까지. 그럼 저는 '술이나 주세요 에휴' 라고 대답하겠지요. 히히.

 조금 더 이것저것을 마셔보고 얼큰해지고 싶었지만 내일 일찍 야쿠시마로 가는 배를 타야하기 때문에 참았습니다. 사진을 보니 참았다는 말은 안 어울리는 것 같지만, 그만큼 즐겁게 먹고 마셨습니다. 바텐더 분께서 선물로 소주 잔도 하나 주셔서 기뻤습니다. 기념품 가게에서 사는 것보다 이런 것이 더 가치있겠지요.

 

마감

 덴몬칸에서 그린게스트하우스까지는 아주 가깝진 않지만 걸어갈 만한 거리입니다. 걸어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을 사서 들어왔습니다. 게하는 조용하더군요. 옥상에서 혼자 맥주를 마시며 여행 첫날의 여운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옥상에는 아동용?이라고 해도 무방할 미니풀이 있었습니다. 어떤 서양 여성분이 올라오더니 하이- 하고 훌렁훌렁 원피스를 벗어던지고 비키니 차림으로 풀에 들어가더군요. 괜히 싱숭생숭했습니다. 한 2분쯤 싱숭생숭했는데 곧 그의 애인으로 추정되는 남성이 와서 또 하이-하고 미니풀에 들어가더군요. 독일어인지 뭔지 모를 언어로 둘이 풀에서 맥주를 마시며 하하호호 하는데 부럽더군요. 깊은 밤이라 적막한데, 그들이 목소리를 낮출수록 왜 제 귀에는 크게 들렸을까요. '나만 없으면 저 친구들 더 진하게 놀겠지?' 라는 마음에 '그렇다면 내 순순히 비켜주지 않으리'라는 못된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곧 '아냐 쟤들은 어차피 날 신경도 안 써'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그냥 맥주 후루룩 마시고 내려와서 씻고 누웠습니다. 무슨 멋있는 걸 보고 맛있는 걸 먹어도 결말은 똑같습니다. 어둠 속에 몸뚱이 하나, 그래도 오늘은 꽤 즐거웠습니다.




이런 식으로 여행기를 쓰다간 영원히 다 쓰지 못할 것 같습니다. 

다음인 야쿠시마부터는 좀 할 만한 이야기만 해야겠습니다!





      

    

  

 

 




Posted by (운영중지)


여행기는 왜

 위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여행 자체를 왜 하는지에 대해 답을 해야겠지요. 연인이라면 번잡한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오붓하게 둘 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을 것 같습니다. 부부라면 익숙한 생활의 관성에서 벗어나 낯선 공간에서 서로의 얼굴을 천천히 다시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저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혼자입니다. 어째서 더 선명한 고독을 느끼기 위해 힘들게 번 월급을 들이부어야 할까요. '진정한 자기 자신을 만나기 위해...' 같은 소리를 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애초에 '진정한 나'같은 개념이 가능한지도 의문이지만) 이미 십 년을 넘게 혼자 살았으며, 매일 밤이 작고 나약한 나와의 대면인데 뭘 더 어떻게 혼자가 됩니까? 낯선 이들과 낯선 공간을 대면하는 것이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일주일에 두 번씩 가는 세탁소 아주머니의 취미를 묻지 않으며, 매일 타는 1224번 버스의 종점이 어디인지 알지 못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모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여행'보다는 '여행자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을 오랫동안 해왔습니다. 그런 제가 어쨌든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왜 갔냐고 물으신다면 글쎄요, '시간이 좀 남았고, 돈도 좀 생겼고, 어차피 외로울 거 내 자취방보다는 바다 앞에서 외로운 게 더 멋있는 기분일 테니까' 정도가 제일 정직한 대답일 것입니다. 

 그럼 여행을 하면 하는 것이지, 여행기는 왜 써야 할까요. 나도 이만큼 즐기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일까요. 만약 여행이 내게 무언가 소중한 것을 주었고 그걸 어차피 아무도 폄하하거나 빼앗지 못할 거라면, 굳이 여행기를 공개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닐까요. 이건 정말 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행을 떠날 때만 해도 여행기를 쓸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보시다시피 쓰고 있습니다. 어째서인지 여행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여행중 몇몇 순간에 문득 들었습니다. 자세히는 천천히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경험이란 것은 늘 주관적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는 것이며, 따라서 제가 어떤 사람인지를 밝히는 것이 여행기를 읽는 데에 약간의 재미를 더해줄 것 같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태어나 줄곧 한국에서 산 30세의 남성입니다. 국어국문학과 언론학을 전공했고 현재 평범히 직장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일본에 방문한 것은 대학생 때 어쩌다가 도쿄에 1박 2일간 체류한 경험이 전부입니다. 다만 고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종종 일본 드라마라거나 일본 음악 등을 즐겨왔기 때문에 약간은 일본에 친숙한 상태였다고 할 수 있겠네요. 일본어는 굉장히 기초적인 것들, '생맥주 주세요' 정도를 구사할 수 있으며, 글자는 전혀 읽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여행 경험 자체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 경제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죠. 여행이라는 것을 삶의 일부로 고려하기 시작한 것은 기껏해야 최근 1년 정도로, 지난 겨울에 베트남 남부에 11일 동안 혼자 다녀온 것이 거의 유일한 여행 경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여행기는 지일파라거나 능숙한 백팩커의 그것이라기보다는 평범한 회사원의 휴가 후기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한 사람에 대해 생각할 때 그를 구성하는 다양한 속성 중에 하나에만 집중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박태환에 대해 생각할 때 그를 '수영 선수' 정도로 생각하지, 그가 어떤 아들이라거나, 어떤 남자친구라거나, 어떤 식으로 음식을 먹는 사람이라거나, 이런 것은 좀처럼 생각하지 않지요. 애석한 일입니다만, 지금은 '수영 선수'도 아니고 '약쟁이' 정도의 정체성으로 그를 소비하고 있지 않나요? 그게 옳은 일인지는 제가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다만 이 여행기의 서술자로서 제 자신을 드러내는 가장 강력한 속성이 뭘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그건 아마 제가 '혼자'라는 것입니다. 저는 제 '혼자'를 늘 느끼거든요. 제 외로움이 타인의 외로움에 대하여 특별한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돌아보니 이번 여행에서 가장 많이 한 말이 '히토리데스(혼자입니다)' 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이 여행기를 '혼자만의 자유를 찾아가는...' 그런 흐름으로 쓰고 싶진 않습니다. 혼자인 것은 정말 지긋지긋한 일이고, 저는 그걸 아름답게 포장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럼 대체 왜 혼자갔냐고요? 같이 갈 만한 사람이 없으니까! 어쩌라고!


왜 가고시마

 7박 8일의 휴가 기간을 정하고 여행지를 고민하기 시작하며, 일단 '일본'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먼저 했습니다. 동남아시아쪽은 지난 겨울에 베트남을 방문했기 때문에 약간 흥미가 떨어진 상태였으며, 미주나 유럽권은 그다지 흥미가 없었습니다. 영어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것도 싫었고요. 자연스럽게 친근한 감정을 갖고 있는 일본으로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늘 좋아하는 조건들 ㅡ 한적한 바다, 양호한 치안, 맛있는 음식과 술 ㅡ 에 부합하는 곳을 찾다보니 '가고시마'란 곳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고시마현 관광연맹이나 가고시마현 공식 블로그에서 한국어로 많은 정보를 적극적으로 제공하고 있어서 더욱 관심이 갔습니다. 

 특히 제가 꼭 가고시마에 가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야쿠시마'와 '다네가시마'라는 두 개의 섬 지역 때문입니다. 저는 늘 섬의 이미지를 좋아했습니다. 어쩌면 제가 생각하는 저 자신과 다른 사람들 모두의 처지와 가장 닮아 있는 이미지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마음의 풍경과 닮아 있는 곳을 갈 때 편안한 감정을 느끼겠지요. 도쿄, 오사카처럼 북적이는 인기 관광지에 가서 셀카봉으로 뽀뽀 사진 찍는 커플이라도 보면 제가 뭔 생각을 하겠습니까? 차라리 적막한 섬에서 밤바다를 마주하고 있는 게 좋겠지요. 가고시마에는 야쿠시마와 다네가시마 외에도 '아마미오시마'라는 일종의 군도 지역도 있는 것 같았으나, 여기까지 가는 교통편(일본 국내선)의 가격이 너무 비쌌고, 또 일정도 좀 빠듯해서 그냥 포기했습니다. 아마미오시마는 남국 분위기가 제대로 나는 휴양지 같았는데, 아무래도 제 색시(아직 존재하지 않는...후...)를 꿈꾸게 만들 것 같다는 걱정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가고시마 시', '야쿠시마', '다네가시마' 세개의 여행지를 큰 축으로 세부 일정을 짰습니다. 항공권을 구하는 데에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가고시마 IN, 후쿠오카 OUT의 항공편을 그럭저럭 감당할 만한 가격에 구할 수 있었습니다. 가고시마 OUT은 왠지 구할 수가 없더군요. 후쿠오카는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뭐 들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전체 일정은

 2016년 8월 10일 (수) 오전에 출국하여 8월 17일 (수) 오후에 귀국하는 일정으로, 개관하면 아래와 같았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이렇게 표까지 만들어서 계획한 것은 아니고, 지금에 와서야 정리하는 것입니다. 


날짜

이동

숙박지

주요 활동 

 1일차 : 8/10 (수)

 가고시마 IN

가고시마 

 가고시마 시내 및 사쿠라지마 관광.

 2일차 : 8/11 (목)

 가고시마>야쿠시마

야쿠시마 

 숙소 주변 관광, 휴식, 3일차 준비.

 3일차 : 8/12 (금)

 -

야쿠시마 

 시라타니운스이쿄 및 조몬스기 산행.

 4일차 : 8/13 (토)

 야쿠시마>다네가시마

다네가시마 

 숙소 주변 관광, 휴식, 4일차 준비.

 5일차 : 8/14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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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네가시마 

 다네가시마 섬 스쿠터 일주.

 6일차 : 8/15 (월)

 다네가시마>가고시마

가고시마 

 가고시마 시내 관광.

 7일차 : 8/16 (화)

 가고시마>후쿠오카

후쿠오카

 캐널시티 주변 관광.

 8일차 : 8/17 (수)

후쿠오카 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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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널시티 구경, 귀국.


 써놓고 보니 빡빡해 보이기도 하고 여유로워 보이기도 하고 묘합니다. 야쿠시마와 다네가시마는 가고시마 현에 속하긴 하지만 가까운 섬은 아닙니다. 일반 페리로 이동한다면 다네가시마는 4시간 30분, 야쿠시마는 5시간 30분을 이동해야 합니다. 저의 경우 고속선 표가 전부 매진이라 일반 페리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죠. 승선 대기 시간 등을 고려하면 거의 반나절을 소모하게 됩니다. 이 시간을 낭비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고속선을 예매하시거나 혹은 이 섬들을 일정에서 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여행에 '낭비'가 어디있겠습니까. 길을 잃는 것조차 재미인데. 오히려 일반 페리를 추천할 만한 요소도 있었습니다. 이는 나중에 다시 적겠습니다. 

 


 이 여행기는 숙박지에 따라 나눠서 '가고시마/야쿠시마/다네가시마/(다시)가고시마/후쿠오카'의 순서로 적어보려고 합니다. 솔직히 끝까지 적을 수 있을지 약간 자신이 없긴 한데, 가능하면 기억이 생생할 때 쭉쭉 쓰려고 합니다. 얼마만큼의 개인적인 느낌을 적어야 할지, 얼마만큼의 세부적인 정보를 담아야 할지 알 수 없지만, 그냥 쓰면서 방향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다소 두서없는 부분이 있더라도, 처음 쓰는 여행기이니 이해해 주세요. 그것이 느낌이거나 정보거나, 원하는 부분을 얻어 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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