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 중순 가고시마와 야쿠시마, 다네가시마를 7박 8일간 여행한 이야기를 하는 중입니다. 이 글은 다섯 번째 밤을 다네가시마에서 보내고 일어난 때부터 시작합니다. 이 날은 다네가시마에서 오전을 보내고 페리를 탔습니다. 그리고 저녁은 가고시마에서 보냈습니다.)



다네가시마 총포관

  아라키 호텔에서 일어나 아카오기 온천에 다녀왔습니다. 체크아웃을 하고 짐을 프론트에 맡겨 둔 뒤 동네 탐방을 시작했습니다. 아라키 호텔의 뒤쪽으로 올라가면 몇 군데의 관광 포인트가 있습니다. 딱히 어딘가에 가겠다는 생각이 없어도 동네 분위기 자체가 좋습니다. 술렁술렁 걷다가 저는 먼저 게츠토우세이(?) 라고 부르는 어떤 고택에 가보았습니다. 활쏘기 체험 등을 할 수 있는 것 같았는데 어째서인지 아무도 없어서 그냥 앞문으로 쓱 들어가서 머쓱하게 뒷문으로 쓱 나왔습니다. 

  게츠토우세이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다네가시마 총포관이 있습니다. 다네가시마는 총포 전래지로서 역사적 의의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무려 16세기에 포르투갈 상인에 의해 총포가 전해진 곳이라고 하네요. 그래서 일찍이 총포 제작 기술이 발달해 일본 내에서는 오랜 시간 동안 다네가시마산 총포를 높이 쳐줬다고 합니다. 이 총포관은 총포 전래와 기술 발달의 역사, 기타 다네가시마의 풍습을 접할 수 있는 꽤나 규모 있는 박물관입니다. 입장료는 420엔으로, 게츠토우세이와 세트로 구매하면 550엔이라고 합니다. (게츠토우세이만의 입장료는 200엔이라고 합니다. 어? 입장료가 있는 곳이었군요. 전 몰랐는데 본의 아니게 도둑 입장을 해버린 셈이 됐습니다; 아무도 없었고 30초만에 통과했지만 어쨌든 부끄럽습니다;)


(다네가시마 총포관의 외관. 꽤 멋집니다.)


  내부에서는 총포 전래과정을 자동 인형극(?)으로 만들어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인형극은 인형극인데 사람이 조종하는 게 아니라 100% 기계식입니다. 일본어로 대사가 나와서 하나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포르투갈 상인이 어찌어찌 표류하여, 당시 다네가시마를 통치하던 영주 앞에 나아가, 총을 쏴서 새를 떨어뜨리고, 도움을 받는 대신 총포 기술을 전해주어서 대장간에서 뚱땅뚱땅, 뭐 이런 내용들이 회전식 무대에서 차근차근 펼쳐집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연행자 없이도 굉장히 디테일하게 작동하도록 짜인 그 인형극 기술이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전시물의 양도 상당합니다. 총덕후 여러분이 오시면 매우 즐거우실 것 같습니다. 굉장히 앤틱한 총기가 많이 전시되어 있는데, 개중에는 '이걸 들고 다니면서 쐈다고?' 싶은 무지막지한 것도 많았습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훨씬 더 가볍고 훨씬 더 튼튼하고 훨씬 더 살상력까지 높은 총기가 많이 있겠지요. 약간 소름 끼치는 기술의 발달입니다. 미사일 같은 것에 비하면 개인 화기라는 개념 자체가 귀엽지 않은가, 이런 생각도 들었지만 총알 한 발로도 비극은 충분히 완성되는 것 아닐까요. 여러분. 평화를 추구합시다. 

  살벌한 전시물과 대비되는 대단히 귀여운 서비스가 있습니다. 지역의 초딩들이 큐레이팅을 해주고 있더군요. 데스크에서 신청하면 받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초딩들이 매뉴얼(스크립트?)을 들고 관광객들을 4~5명씩 데리고 다니면서 전시물에 관한 각종 정보를 낭랑하게 읊어줍니다. 인간 녹음기 정도의 퍼포먼스지만 참 귀여웠습니다. 요새 서울에서도 '마을이 학교다'라는 슬로건 하에 학교와 지역사회의 연계가 화두인데 이런 것도 좋은 사례인 것 같습니다. 


  (총포관의 입구에는 이런 관광 안내 책자가 있는데, 이것도 지역 초딩들이 만든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런 방식이 일본에서는 보편적인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면 꼭 야쿠시마의 터미널에서도 지역 초딩들이 만든 관광 지도나 홍보물 따위를 전시해놓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다네가시마에서 들렀던 가게의 벽면에 초딩들이 만든 '동네신문' 같은 것이 붙어있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런 것이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관광객의 입장에서 보자면 뭔가 마을 공동체를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이 생생해서 좋았습니다. 주민 전체로부터 환영받는 기분이랄까요. 또 교육적인 입장에서 보더라도, 단지 '과제'를 내서 '평가 점수'를 받고 끝나는 것보다는 이렇게 실질적인 활용 맥락을 만들어주는 편이 더 많이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학창 시절 냈던 그 수많은 과제들은 다 어디로 갔나요? 그게 논설문이건 그림이건 그냥 선생님의 캐비넷 안에서 한두 해 정도 보관되다가 쓰레기통에나 들어갔겠지요. '글을 써서 동네를 소개한다'와 '글을 써서 동네를 소개(하는 것으로 가정)한다'는 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까.



다네가시마 페리 터미널

  티켓 오픈 시간이 되어 페리 터미널에 갔습니다. 오픈은 11시 30분이었고 저는 11시 20분에 갔는데 이미 사람들이 줄을 꽤 서있더군요. 심지어 창구도 오픈된 상태였습니다.^^ 이곳의 승선 시스템은 가고시마에서 야쿠시마를 갈 때와는 또 조금 달랐습니다. 일단 승선신고서를 작성해서 창구에 내고 운임을 지불하면 티켓을 주는 것은 똑같은데, 번호표도 같이 준다는 것이 약간 다릅니다. 저는 99번 표를 받았습니다. 오픈 시간보다 10분 먼저 간 제 앞에 이미 98명이 있었던 것이지요. 핫핫. 아무튼 창구 직원 분이 승선은 1시부터니 그때 오라고 합니다. 1시가 되면 이 번호표를 갖고 뭘 어떻게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으나 뭐 눈치껏 타면 되겠지, 하고 터미널을 나왔습니다. 점심을 먹으러 가려고요.



이름을 알 수 없는 어제 거기

  다네가시마에서 가장 먼저 식사를 했던 후샤에서 한번 더 식사를 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습니다. 워낙에 분위기가 좋은 곳이니까요. 그런데 날도 더우니 이탈리안보다는 좀 시원한 뭔가가 먹고 싶더라고요. 어제 교자와 가라아게를 먹었던 그 식당(이자카야?)이 생각났습니다. 아카오기 온천 바로 옆에 있는 거기입니다. 거기 벽에 시원해보이는 면요리(?) 같은 것의 홍보 포스터가 붙어있었거든요. 거기서 먹고 아라키에서 짐도 가져오면 되겠다 싶어서 총총 걸어갔습니다.


(그 시원해보이는 면요리. 실제로 시원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일본에서는 저렇게 찍어먹는 라멘은 '츠케멘'이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저건 '냉-츠케멘' 정도가 되겠지요. (뜨거운 츠케멘도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전날의 과식으로 몸이 좀 무거웠는데, 가볍게 후루룩 후루룩 먹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저기 젓가락 밑에 종지 두 개가 보이실 텐데요. 츠케멘을 주문하니 아주머니께서 갑자기 저 종지 두개에 소스를 조금씩 담아서 주시더라고요. 그리고 일본어로 뭐라고 하셨는데 사실 못 알아들었습니다. 먹어보라는 몸짓을 하시더군요. 아하, 찍어먹는 소스가 두 가지니까 둘 중에 고르라는 뜻이었습니다. 한쪽은 고마(참깨) 소스였고, 한쪽은 유자 소스인 것 같은데 잘 모르겠습니다. 고마가 좋아요^^ 하니까 알겠다고 웃으시더라고요. 말이 안 통하는데 난처하다거나 답답하다는 표정도 한번 짓지 않고, 혹은 자기 마음대로 소스를 가져오지 않고 최선을 다해 웃으며 접객을 해주신 아주머니의 친절에 또 한번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기분이 좋아지면? 네, 맥주를 또 마셨습니다. 이제 다네가시마에서 더 이상 무엇을 먹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참 아쉬웠습니다. 혼자 맥주를 마시며 '결혼하면 이런 시간도 그리워질 거야'라고 잠시 생각했지만, 이건 뭐 어디까지나 결혼을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겠지요. 우스운 생각입니다. 과연 그런 날이 올지 점점 자신이 없네요. 



프린세스 와카사

  승선 시각인 1시에 맞춰 페리 터미널에 갔습니다. 터미널은 많은 사람들로 웅성거렸습니다. 1시가 되자 메가폰을 든 아저씨가 나타났습니다. 1번부터 10번까지는 타라고 하시더군요. 이렇게 10명 단위, 또는 20명 단위로 번호를 불러서 탑승을 시켰습니다. 티켓을 끊자마자 무조건 선착순으로 타야 하는 가고시마-야쿠시마 페리보다는 합리적인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99번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짧은 시간을 기다려서 프린세스 와카사에 승선할 수 있었습니다.

(다네가시마와 가고시마를 오가는 '프린세스 와카사'의 선수입니다.)


  프린세스 와카사는 가고시마에서 야쿠시마를 갈 때 탔던 '페리2'보다는 규모가 작아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큰 배입니다. 저는 4시간여 동안 편하게 갈 만한 자리를 탐색했습니다. 푹신한 쇼파가 있는 어떤 방이 보였습니다. 여기다 싶어서 자리를 잡았지요. 이 방의 전면에 있는 텔레비젼에서 유아용 애니메이션을 틀어놓고 있었는데, '뭐 곧 끄겠지'하고 쉽게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건 착각이었습니다. 두 시가 되어서 뱃고동이 울리고 배가 출발하는 데에도 애니메이션은 계속 되었습니다.  음량이 적절했다면 참고 잠을 청했을 텐데 정말 시끄럽더군요. 왠지 점점 집중이 되어서 귀를 후려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슬슬 깨달았죠. 여기에 자리를 잡은 게 실수라는 것을. 여기에 계속 있다가는 앞으로 네 시간 동안 아동용 애니메이션에 고문을 당할 각이었습니다. 과감하게 짐을 챙겨서 방을 나왔습니다. 물론 복도고 홀이고 피난민(?)들로 가득하더군요. 실내에는 두 다리를 뻗을 만한 공간이 없어보여서 실외로 나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배의 측면에 있는 복도에 그냥 주저 앉았습니다. 수평선을 보며 네 시간 동안 가는 것도 괜찮다 싶었습니다. 바닥은 조금 딱딱했지만 인구 밀도가 너무 높은 실내에 비하면 차라리 쾌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잠시 바닷바람을 쐬며 책을 읽었는데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늘이 점점 짧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배의 서편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지요. 해가 굉장히 뜨겁기 때문에 그늘과 그늘이 아닌 곳의 차이는 큽니다. <볼케이노>나 <단테스피크>같은 영화를 보면 용암이 사람들을 위협하는 장면이 있는데 거의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피신했습니다.

  배의 후미에는 벤치에 앉은 사람, 바닥에 드러누운 사람, 벽에 기대있는 사람 등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습니다. 후미는 햇빛으로부터는 자유롭지만, 엔진 소음이 조금 심하고, 구조상 바람이 별로 오지 않기 때문에 덥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어째서인지 커플이 많더군요. 그들의 사랑은 매우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솔직히 눈앞에 두고 보기에는 너무 괴롭기 때문에 그냥 배의 동편으로 갔습니다.

  배의 동편에는 서편보다 많은 사람들이 있더군요. 배의 진행 방향과 태양의 위치를 계산한 현자들입니다. 저도 적당히 자리를 잡고 다리를 뻗었습니다. <우미인초>를 조금 읽었습니다. 그리고 전화기에서 몇 개의 메시지와 전화 번호를 지웠습니다. 이제 돌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뭍에 발을 디딜 때는 떠날 때와는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어차피 잊을 수는 없는 것인데, 몇 개의 디지털 기록을 없애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그래도 그러한 제스처로서 조금 새로운 기분을 느낄 수 있다면 충분하겠지요. 제가 뭘 하든지, 무슨 생각을 하든지 물론 바다는 그냥 그렇게 있었습니다. 바다 앞에서는 추억도 다짐도 그냥 다 농담 같기도 합니다. 




가고시마 돌핀포트

  네 시간여가 지나서 가고시마에 도착했습니다. 저는 첫날에 숙박했던 '그린게스트하우스'에 다시 예약을 해둔 상태였습니다. 게스트하우스에 가기 전에 터미널 근처에 있는 돌핀포트를 구경했습니다. 돌핀포트는 항구를 따라 길게 지어진 몰입니다. 식당과 카페가 다수이며, 약간의 상점이 있습니다. 

(돌핀포트의 안내판. 돌핀포트는 일부러 찾아갈 필요까지는 없지만 지나가다 들러볼 만한 곳입니다.)


  저는 1층 한쪽에 있는 잡화점인 '산도리-즈'에 가보았습니다. 기념품 살 만한 것이 있나 해서요. 굉장히 귀엽고 따뜻한 느낌의 소품이 많아보였습니다. 무엇을 사진 않았는데요, 괜히 이곳이 기억나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가게에 들어섰을 때 배경음악으로 'All You Need is Love'가 나오고 있었는데 왠지 찡했습니다. 우쿨렐레 같은 악기로 굉장히 간소하게 편곡해서 (아마도) 일본의 여성 가수가 부른 버전이었어요. 너무나 적절한 때에 적절한 음악이 갑자기 들려오는, 그런 순간에 해당했습니다. 7000년을 살았다는 나무를 보았으며, 바다를 다섯 시간씩 두번 건넜으며, 산 속에서 해가 뜨는 것을 보았고 갯바위에서 해가 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그게 산토리니건, 카트만두건, 레이캬비크건 아무리 멀리 날아가도 돌아올 자리는 정해져있고 그 자리에선 이 노래가 어김없이 나올 것입니다. 




다시 그린게스트하우스

  두 번째일 뿐이지만 괜히 익숙하더군요. 오늘은 아예 독실을 예약해둔 상태였습니다. 상당히 아담한 방에 매트리스가 깔려 있고 담배를 피운다든지 빨래를 널 수 있는 작은 발코니도 있습니다. 물론 욕실이나 화장실은 공용 공간을 이용해야 하지만 가격대 성능비가 좋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독실이라니, 제가 선택했지만 참 저다운 선택이네요.

  가고시마에 처음 도착한 날 왔을 때는 가벼운 흥분 상태였는데, 지금은 여행이 끝나가서 그런지 쓸쓸한 마음이 컸습니다. 이제는 '돌아가는 길'에 해당하니까요. 문득 '삶이 여행이라면, 돌아가는 길은 몇 살 때부터일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아마 돌아가는 날을 의식할 때부터겠지요. 그것을 의식하지 말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정답이겠지만, 쉽게 떨쳐버릴 수는 없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오늘 밤은 아직 내일이 아니더라'라는 시 구절을 기억하며, 남김없이 먹고 마시리라ㅡ 하는 마음으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숙소를 나섰습니다. 이때는 아직 몰랐습니다. 오늘 밤이 얼마나 훈훈해질지.




와카나

  일단 가고시마니까 '흑돼지 샤브샤브'를 먹으려고 했습니다. 돼지고기의 샤브샤브는 한국에서 좀처럼 구경하기가 어려우니까요. 가고시마에서는 특산 음식답게 여러 가게에서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냥 길을 걷다가 쉽게 발견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다만 혼자 먹을 만한 양을 주문 가능한 집을 찾을 수 있을지 약간 걱정이었습니다. 조금 검색을 해보았는데, 덴몬칸에 있는 '와카나'라는 가게에서 '히토리 샤브샤브'를 판다는 정보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가게는 골목에 숨어 있긴 하지만 크게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저기 안쪽에 불 켜진 흰색 간판이 걸린 곳이 '와카나'입니다. 한자로는 '吾愛人'인 것 같아요.)


 '와카나'는 일본의 드라마나 영화에서 본 것만 같은 주점입니다. 꽤 규모가 있는데, 1층에는 십수 명은 나란히 앉을 법한 큰 다찌가 있고, 몇 개의 테이블이 있습니다. 2층도 있는 것 같았는데 올라가보진 않았습니다. 저는 물론 다찌에 앉았지요. 다찌 앞은 주방인데, 요리사 세 분 정도가 매우 바쁘게 이것저것 요리를 하고 계셨습니다.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느긋하다기보다는 상당히 활기찬 느낌의 가게입니다.


(먼저 '1인 샤브샤브'와 '사츠마아게'를 주문해보았습니다.물론 소주도. )


  1인 샤브샤브는 1500엔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상당히 많은 분이 혼자 이것을 드시고 계셨습니다. 귀여운 1인용 화로와 육수가 담긴 냄비를 주면서, 종업원 분이 일본어랑 영어 중에 뭐가 더 편하냐고 물으시더군요. 영어가 좀 낫다고 하니 영어로 된 '와카나의 샤브샤브 먹는 법' 안내문을 한장 주셨습니다. 이 매뉴얼에 따르면 야채를 먼저 넣고 충분히 우려낸 다음에 고기를 샤브샤브로 즐기라고 하더군요. 물론 따라했습니다. 와, 맛있었습니다. 돼지고기의 샤브샤브가 이렇게 연할 수 있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국물도 굉장히 담백하더군요. 그리고 저 죄없고 따뜻한 두부를 먹는 재미도 쏠쏠했습니다. 소주까지 한 모금 마시니 마치 퇴근 길에 홀로 사치를 즐기는 일본 샐러리맨 같은 기분이 들더군요. 

  사츠마아게도 매우 맛있었습니다. 첫째 날에 소주 바 '사사쿠라'에서 먹은 것보다 더 맛있어서 하나 더 시키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어묵을 튀긴 것일 뿐인데 괜히 끌리더라고요. 그리고 사진에서 조그만 그릇에 담긴 저것은 여주(고야)로 만든 샐러드 같은데, 심지어 기본안주인 저것도 맛있었습니다. 오독오독한 여주에 아삭한 양파, 고소한 드레싱(마요네즈 계열인듯? 잘 모르겠어요.)이 술안주로 너무나 그럴듯했습니다. 먹고 마시다보니 '앗 여기는 분명 맛집이야, 한 가지를 더 먹어보자'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습니다. 그래서 메뉴판을 보면서 좀 고민하다가 토리사시미(닭사시미)를 시켜보기로 했습니다.


(껍질만 바삭하게 익힌 닭의 회입니다. 물론 소주도 한 잔 더.)


  양이 너무 많으면 어쩌나 했는데 역시나 딱 적당한 양으로 나오더라고요. 양파, 실파, 간 생강을 곁들여서 간장 소스에 살짝 찍어서 먹는 것이 이 집의 방식인가봅니다. 닭의 회는 처음이었는데 일단 식감이 '질깃질깃'한 것이 재미있었습니다. 보통 소의 육회는 연한 느낌이잖아요? 그런데 이건 확실히 '고기'의 식감이 느껴졌습니다. 입 안에서 찢어지는 닭의 생살을 느끼고 있자니 제가 야만인이 된 것 같아서 상당히 흡족했습니다. '우왓 이거 맛있어!'할 때의 그 '맛있다'는 아니지만 한번쯤 꼭 먹어볼 만한 음식인 것 같습니다. 일단 저 껍질을 좀 보세요. 하. 소주 한 잔 더.

  이상이 '와카나'에서 먹고 마신 것들입니다. 이외에도 야키토리를 비롯해서 다양한 메뉴가 준비되어 있으니 여럿이서 가도 각자 좋아하는 것을 먹고 마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떤 취향에도 들어맞을 수 있는 인기 만점의 대중 맛집이라는 느낌. 그래서인지 인터넷에 와카나에 대한 정보도 꽤 많은 것 같습니다. 궁금하신 분은 네이버에서 '가고시마 와카나'를 검색해보세요. 



야타이무라 : TAGIRUBA

  팥이 들은 달콤한 하드를 하나 먹으면서 가고시마의 밤거리를 룰루랄라 걸었습니다. 가다가 적당한 곳이 있으면 또 들어가볼까, 이런 생각이었죠. 밤공기가 선선했고, 퇴근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굉장히 활기차보이는 좁은 골목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25개의 소규모 주점이 모여있는 '가고시마 후루사토 야타이무라'였습니다.


 (골목의 입구에 있는 안내판에서 각 점포의 간략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가고시마 안내 팜플렛에도 홍보가 되어 있긴 하지만 일부러 가려는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서울로 치면 동대문 앞 포장마차 같은 느낌이 아닐까 했거든요. 현지인은 별로 없고, 비싸고, 맛도 없는 그런 곳이 아닐까 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발이 닿은 이상 들어가보기로 했습니다.


(가게들이 늘어선 골목 안은 무척 활기차서, 마치 축제 같았습니다.)


 모든 가게가 7~8석만 갖추고 있는 소규포 가게입니다. 골목에도 한두 개씩 테이블을 내어놓고 장사를 하는 집이 많았습니다. 골목에 삼삼오오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들, 어느 가게에 들어갈까 설레며 걷고 있는 사람들, 자기 가게에 들르는 것이 어떻냐고 홍보하는 종업원들 (호객 행위라고 하기엔 가게 앞에 가만히 서서 밝은 미소와 함께 외칠 뿐이라 거부감은 전혀 없었습니다.)로 골목 안은 마치 축제처럼 북적거렸습니다. 갑자기 주정뱅이 동화마을로 워프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는 배도 부르고 하니 사시미를 먹을 생각으로 20번 가게인 'TAGIRUBA'에 들어갔습니다. 안내판에 대표 메뉴 사진이 걸려 있는데, 무슨 생선인지는 읽을 수 없었으나 하여튼 뭔가의 사시미 사진을 걸어놓은 곳이거든요.

  TAGIRUBA의 안쪽에는 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바깥 테이블에 앉았습니다. 건장한 남성 분께서 친절히 맞아주셨는데, 안타깝게도 바깥 테이블에서는 사시미를 서빙 받을 수 없다고 하더군요. 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냥 일어나기도 뭣해서 추천 메뉴를 부탁드렸는데, 아마도 무슨 생선의 머리 조림처럼 보이는 것을 권해주셔서 그걸로 부탁드렸습니다.


(그 뭔가의 머리조림. 소주도 또 한 잔^^ )


  종업원 분께서 제가 한국 사람인 것을 아시고 야타이무라의 한국어판 안내 팜플렛을 주셨습니다. 모든 가게에 대한 간략한 정보가 적혀 있지요. 제가 들어간 TAGIRUBA에서 대표 메뉴로 걸어놓고 있는 사시미는 바로 가고시마의 나가시마 초에서 차를 먹여서 키운 방어회였습니다. 앗? 한여름에 방어? 더 먹고 싶더군요. 그러고보니 이 머리 조림은 어쩌면 방어의 머리 조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호시탐탐 안쪽에 자리가 나길 기다리다가 드디어 옮기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안쪽은 가로세로가 4미터나 되려나 싶은 좁은 공간인데, 전석이 다찌입니다. 다찌에 앉아 방어의 사시미를 부탁드렸습니다. 주방장님이 방어를 좋아하냐고 물으시더군요. 무척 좋아하지만 한국에서는 겨울에만 먹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일본에서도 방어는 겨울이 보통이지만 이건 양식하는 방어라서 지금도 먹을 수 있다고 하시더군요.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때요. 


(으아아)


(으아아아아아아아)


  이 방어는 정말 어메이징하게 맛있었습니다. 제가 막입이라서 그런가요? 여행 버프를 받은 걸까요? 서울에서 겨울에 먹는 대방어 못지 않게 훌륭했습니다. 식감은 약간 연어처럼 부드러운 쪽에 가까웠는데, 굉장히 기름진 감칠맛이 났습니다. 가끔 저는 이 사진을 꺼내보면서 그 맛을 되살려보려고 애쓰곤 합니다. 그만큼 강렬한 맛이었습니다. 가격도 1,000엔 미만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한 접시 더 먹고 싶었지만 이렇게 된 바에 한 가게에 더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 접시만 먹고 나왔습니다.



야타이무라 : 쉬는 시간

  화장실도 다녀오고 담배도 좀 태울 겸 골목 구석에 있는 흡연 공간으로 갔습니다. 흡연 공간이라고 해봐야 사람들의 시선이 잘 안 닿는 아주 으슥한 구석에 재떨이 하나를 갖다 놓았을 뿐입니다. 담배를 태우고 있자니 어딘가의 주방에서 일하는 듯한 복장의 젊은이가 오더군요. 가게 손님도 아닌데 왠지 저에게 힘차게 인사를 하더라고요. 꼭 자기네 가게에 들른 사람이 아니더라도 이 골목에 온 사람은 모두 고객으로 생각하나보다, 참으로 친절한 사람들일세, 라고 생각했습니다. 꽤나 미청년이었던 그는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습니다. 태생이 꼰대인 저는 '주방에서 근무하는 분이 영업중에 담배를 태우러 온 건가? 그건 좀 별론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냐면, 그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리더라고요. 꼭 무슨 도게쟈를 하는 모양새였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앉은 채로 담배를 태우는데, 담배를 피우는 중에도 눈빛이 형형하더라고요. 그 눈빛에는 눈코 뜰 새없는 일의 어떤 여운이 남아있었습니다. 9이닝 완투로 녹초가 된 채 덕아웃에서 연장 등판을 기다리는 선발 투수 같았어요. 네, 그 순간에 저는 뭐랄까 '성실히 일하는 청년의 초상' 을 본 느낌이었습니다. 그의 오른쪽 어깨 위로 '나는 오늘 나를 위해 박카스를 사주었습니다'라고 글자를 띄우면 그대로 박카스 광고가 될 그림이었어요. 이 골목의 활기를 위해, 손님들의 즐거움을 위해 영업 시간 내내 앉지도 못하고 얼마나 수고를 했을지 단번에 짐작이 갔습니다. 담배 좀 태우면 어떻습니까. 저희 집 근처에도 이자카야가 있는데 거기 주방장은 그냥 가게 앞에서 피우더라고요. 근무중에 주방 옷을 입고요. 그것에 비하면 이 골목으로 숨어든 이 청년은 얼마나 예의바릅니까. 캔커피라도 한 개 사주고 싶었습니다. 동시에 나는 지금 서울에서 저 청년만큼 열심히 일하고 있는가, 이런 반성도 했습니다. 



야타이무라 : SAKURAYA

  차방어회, 소주, 청년ㅡ 이것들로부터 가벼운 흥분을 얻은 저는 두 번째 가게를 택해 들어갔습니다. 가게는 야타이무라의 세 개 입구 중 하나인 '사이고문' 바로 옆에 있는 7번 'SAKURAYA'입니다. 이곳은 '긴코만 산 구비오레 고등어회'를 취급한다고 팜플렛에 있었는데 그게 뭔지는 몰랐지만 하여튼 대단해보여서 들어갔습니다. 메뉴판의 사진을 가리키며 이거 부탁드린다고 하니까 뭐라고 뭐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추측하기론 '그건 다 떨어졌지만 다른 어떤 어떤 사시미가 있다' 정도의 말씀인 것 같았어요. 그래서 그럼 그걸로 주세요, 소주도 로꾸로 한 잔 주세요, 했습니다. 누가 들어도 외국인의 일본어로. 

  다찌에는 마음씨 좋아 보이는 중년 남성 한 분과 중년 여성 두 분이 술을 드시고 계셨는데 남성 분이 저에게 말을 거셨습니다. 무려 중국어로 '니 슈 중궈런마?' 하시더라고요. 여기서 제가 '워 슈 한궈런' 했으면 일본인과 한국인이 중국어로 대화를 나누는 동아시아 화합의 장이 열렸을 텐데 아쉽게도 그 생각을 못했습니다. 반사적으로 '와타시와 간고쿠진데스' 해버린 것이지요. 중국어로 대답했으면 상당히 초현실적인 상황이 될 뻔했는데 아깝습니다.ㅎㅎ 아무튼 중년 남성과 그 일행 분들은 꽤 놀라시더군요. 가고시마에는 한국인이 그렇게 흔하진 않은가봅니다. 꽤 호기심이 생기셨는지 여행중이냐, 학생이냐, 일본에는 처음이냐, 등을 물어 오셨습니다. 야쿠시마와 다네가시마를 다녀왔다고 하니 자기도 다네가시마까지는 안가봤다면서 적잖이 놀라시더군요. 제가 기비나고(샛줄멸)의 사시미와 소주를 시켰더니 세 분이 박수를 치면서 오오, 그래 가고시마에서는 그거지, 라고 하시더군요.

(기비나고 사시미와 소주. 가고시마 현지인에게 인정 받은 초이스입니다.)


  여사님이 명동에서 삼겹살 먹은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데 이십대 초중반쯤으로 보이는 일본인 청년 두 명이 들어와 제 옆자리에 앉았습니다. 아까의 남성 분이 어서 오라면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시더군요. 모두 아는 사람인가? 했는데 전부 다 모르는 사람이랍니다. 심지어 그 남성 분과 옆에 여성 두 분도 초면이라고 하더라고요. 주방장 분께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이 이것이 야타이무라의 보통 분위기라고 합니다. 다같이 다찌에 둘러 앉아서 뭐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술과 음식을 즐기다가 헤어지는 것이지요. 참으로 멋지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을 나누는' 일에 있어서는 흔히 우리나라가 더 훈훈하다는 고정관념이 있지만, 솔직히 서울에서의 삶은 개뿔도 그렇지 않잖아요? 생각해보면 한국은 약간 '우리 그룹'끼리는 굉장히 끈끈하되, '낯선 사람'에 대하여는 조금 배타적인 면이 강한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오히려 더 개인적인 사회일수록, 암묵적인 경계선이 더 분명할수록 역설적으로 스스럼없는 스몰토킹이 가능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큐슈 지방 특유의 문화일까요? 어쨌든 저는 이런 식의 가벼운 연대가 매우 반가웠습니다. 자연스럽게 두 청년과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술과 음식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두 청년은 오이타에서 초등학교인지 중학교를 함께 졸업하고 소식이 끊겼다가 이곳 가고시마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다고 합니다. 미소나 쇼유 같은 것을 파는 업체에서 영업을 하고 있다고 해요. 이 '영업'이란 것을 한 친구가 표현하는 방법이 재미있었는데 두 손을 펼쳐서 비비는 시늉을 하더군요. 네, 우리가 흔히 '사바사바'라고 말하는 그거 있잖아요. 한국이나 일본이나 영업맨들의 애환은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외에도 많은 유쾌한 장면이 있었는데 네 달 전이라서 잘 기억이 안나지만 뒤죽박죽인 그대로 묘사를 해보겠습니다. 아래 대화는 몇 잔의 소주, 일본주, 기비나고 사시미, 케이항, 감자튀김 등이 테이블 위를 지나가면서 이루어졌습니다. 


청  년 : 나 소녀시대 좋아함. 빅뱅도 알아. 너도 좋아함?

     : 윽. 30대의 남성은 보통 아이돌에 그다지 흥미 없어.

아  재 : 어, 그럼 한국에서 30대 남성은 보통 뭐에 흥미가 있어?

     : 글쎄, 돈, 차, 집, 결혼, 그런 것들?

아  재 : 과연 그렇네. 일본도 그렇지. 너는 그것들 잘 되고 있니?

     : 나니모 나이!ㅋㅋㅋㅋㅋㅋ

(모두)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건배ㅋㅋㅋㅋㅋㅋㅋ

      

청  년 : 여자친구 있습니까?

    : 없어. 

청  년 : ㅋㅋㅋㅋ 당신 내 나카마ㅋㅋㅋ

    : 나카마가 뭐여?

청  년 : 음... 에... '세임 레베루 히토'ㅋㅋㅋ

    : ㅋㅋㅋㅋㅋㅋㅋ건배ㅋㅋㅋㅋㅋㅋ


여사님 : 일본 여자는 어때?

    : 모두 웃는 얼굴. 야채(야사이). 좋습니다.

여사님 : 뭐?ㅋㅋㅋㅋㅋㅋㅋ

    : 아니 아니, 상냥하다고(야사시이)ㅋㅋㅋㅋㅋ

여사님 : ㅋㅋㅋㅋ오? 일본 여자도 괜찮은 거야? 

    : 저는 좋다. 그런데 일본 여자가 나에게 관심 없어 ㅋㅋㅋ

(모두) : ㅋㅋㅋㅋㅋㅋ건배ㅋㅋㅋㅋㅋ


청  년 : (저를 보며) '다까라'가 영어로 therefore인가?

    : 너 지금 나한테 질문? 나 한국인인데?

아  재 : (청년에게) 바카ㅋㅋㅋ 뭐하는 거야 ㅋㅋㅋ

청  년 : 아 미안ㅋㅋㅋㅋㅋㅋ건배ㅋㅋㅋㅋㅋㅋ


  이렇게 실없이 낄낄대면서 자정 가까이 술을 마셨습니다. 음식도 나눠 먹고, 소주도 추천 받아 마시고, 기념 사진도 찍었지요. 화룡점정은 아재님께서 이 술집에 있던 모든 사람의 술값을 다 계산한 것입니다. 한 2만엔은 넘게 나왔을 것 같은데 쿨하게 계산하셨습니다. 본인은 여기에 있는 26개 주점을 전부 다 가보았는데, 가끔 이렇게 즐거울 때면 계산을 종종 하신다고 합니다. 네, 저는 운 좋게도 야타이무라 터줏대감님을 만난 셈이지요. 청년들은 '오오 카미사마'하면서 절을 올리더군요. 물론 저도 깍듯이 예의를 표했습니다. 맛있는 음식, 더 맛있는 술, 좋은 사람들을 만끽하고도 돈을 한 푼도 내지 않으려니 약간 죄송한 마음까지 들더군요. 가게 문을 닫을 시간이 되어 사장님께도 정말 즐거웠다고 인사를 제대로 드렸습니다. 두 청년과도 가게 앞에서 헤어졌습니다. 




  숙소로 돌아가며 생각했습니다. 여행지에서 보내는 밤이란 건 이럴 수도 있구나, 제가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이 실현된 밤이었습니다. '운명적으로 사랑에 빠지기' 정도를 제외하면 다 이루어진 것 같아요. 그건 너무 초현실적인 바람이니까 뭐 그렇다고 치고, 아직까지 이날 밤을 생각하면 흐뭇한 미소가 지어집니다. 여행지에서 낯선 사람들과 어울려 밤을 보내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은 아니며, 저 역시 게스트하우스 등에서 그런 적이 있긴 하지만 이날은 뭔가 특별했습니다. 비좁은 포장마차, 평범한 남자 사람들, 더듬더듬 외국어, 몇 잔의 소주, 신선한 안주 뭐 이런 것들 하나하나 꼽아보면 그렇게 특별할 것까진 없지만, 이것들이 모두 조화롭게 어우러지니 굉장히 유쾌하더라고요. 

  물론 이날 밤도 역시나 게스트하우스의 독방에서 이불을 추켜올리며 잠든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네 달이 지난 지금 서울에서의 제 삶도 여전히 혼자입니다. 살림살이는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고, 정확히 제자리로 돌아와 토요일 저녁인데 컴퓨터 앞에 앉아서 여행기나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추억은 희망만큼 강력한 것, 이날 먹은 흑돼지 샤브샤브며, 차방어의 사시미며, 시원한 쇼츄의 감각은 아직도 생생하고, 가고시마 사람들의 친절과 환대는 더 생생합니다. 좋은 순간이 한번 있었다면, 그건 다시 있을 수도 있다는 얘기겠지요. 적어도 저는 세상이 가끔 선물처럼 즐거운 밤을 만들어주기도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 점에서 추억과 희망은 한 몸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 가고시마 가세요. 야타이무라 가세요. 혼자여도 괜찮습니다. 제가 해봤어요.

 


     


* 맺음말

  7박 8일의 가고시마 혼자 여행기는 여기서 끝납니다. 귀국하기 전 후쿠오카에서 하룻밤을 더 보냈지만 그다지 감흥은 없었습니다. 후쿠오카는 굉장히 크고 높고 시끄러운 곳이었습니다. 라멘, 호르몬, 말 사시미 등을 먹어치웠고 나카스 강변도 걸었습니다만 그렇게 마음에 다가오지는 않았습니다. 서울과 비슷해서인지, 귀국 하루 전이라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다지 적고 싶은 것이 없고, 또 후쿠오카는 인터넷에 여행기가 가득 가득하므로 그냥 생략하려고 합니다. 

  먹고 살기 바쁘다보니 여행기를 다 쓰기까지 네 달이나 걸렸습니다. 조금 귀찮아져서 대충 넘어가 버린 때도 있고, 어쩌면 조금 과장한 곳도 있을 것입니다. 무엇을 기대하셨든, 얼마만큼의 실망을 하셨든 여기까지 읽어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가고시마, 야쿠시마, 다네가시마는 굉장히 멋진 곳이므로 방문을 적극 권하고 싶습니다. 특히 당신이 혼자 갈 예정이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무척 고독하겠지만 당신이 걱정하는 것보다는 덜 고독하거나, 혹은 당신이 기대하는 것보다 더 고독합니다. 

  저는 이 여행으로 일본과 일본의 섬 여행에 굉장히 좋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번 겨울에는 또 다른 섬들을 찾아가보려고 합니다. 아마미오시마, 도쿠노시마, 오키노에라부, 요론에 모두 발을 딛는 것이 목표입니다. 여행기도 아마 또 쓸 것 같아요. 왜냐하면 또 혼자 갈 거니까. 혼자 가지만, 정말로 혼자만 기억하고도 만족할 정도로 강한 사람은 못 되니까요. 핫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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