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시마에서 야쿠시마로

 과연 배를 탈 수 있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준비를 서둘렀습니다. 아침 6시 50분에 터미널에 도착했습니다. 티켓팅이 시작되기 20분 전이었는데 이미 오십여 분 정도는 줄을 서 있었습니다. 줄이 하나가 아니라 셋이었는데 각각이 무엇이 다른지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승선신고서를 써서 들고 눈치껏 줄 하나에 붙었습니다. 승선신고서에는 이름, 성별, 나이, 행선지 등을 간략하게 적게 되어있습니다. 잠시 후 터미널 직원분이 돌아다니면서 승선신고서를 작성해두라는 안내를 했는데, 제 앞에 서있던 서양 형님에게도 뭐라고 뭐라고 하시더군요. 서양 형님은 '하나도 못 알아들었지만 일단 움직여보자'라는 얼굴로 다른 줄로 가서 섰습니다. 그리고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저를 보고 어깨를 으쓱하고 다시 돌아오더군요. 알쏭달쏭 답답 얼굴을 하길래 제가 말했습니다.

 "아까 그 분은 저기에 연필이 있다고 말한 거야."

 "(아하 표정) 워우! 그랬구나. 그럼 이 줄이 야쿠시마 줄은 맞는 거야?"

 "확신은 못 해. 나도 여행자거든."

 왠지 동병상련의 느낌이었습니다. 그렇게 두 사내가 멀뚱멀뚱 서있다가 티켓팅이 시작되었습니다. 다른 줄에 서있던 여성 분이 먼저 티켓 구매에 성공한 뒤에 제 앞의 서양 형님에게 오더군요. 그렇습니다. 그는 동행이 있었던 것이지요. 형님은 '먼저 간다'라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고 사라졌습니다. 다시는 동병상련의 감정을 함부로 갖지 않으리, 생각했습니다.

 티켓은 5,100엔입니다. 티켓을 구매하고도 승선 시간까지는 한 시간 이상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왠지 다들 서둘러 탑승하는 분위기더군요. 어차피 다섯 시간이나 가야하는데 왜들 이렇게 빨리 타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저는 쫄보니까 따라서 서둘러 탔습니다. 승선장으로 나가니 어마어마하게 큰 배가 보이더군요. 


페리 야쿠시마

 배를 타니 왜 다들 서둘렀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이 배에는 좌석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것이죠. 이 커다란 배에는 승객을 위한 좌식 객실이 몇 개 있으며, 쇼파가 있는 라운지 형태의 공간도 있고, 극장(상영은 안 하는 것 같지만) 같은 형태의 공간도 있습니다. 이런 다양한 공간 중에서 편한 곳에 자리를 잡으려면 빨리 타야했던 것입니다. 저는 꽤나 일찍 탄 편이기 때문에 선택의 폭이 꽤 넓었습니다. 일단 홀에 있는 코인락커에 배낭을 집어 넣은 뒤 한바퀴를 슥 돌아보았습니다. 좌식 객실이 가장 인기가 높아서 사람들이 제일 먼저 찼더군요. 저는 쇼파와 테이블이 있는 라운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때만 해도 제가 얼마나 좋은 자리를 잡았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중에 배의 복도고 계단이고 아무데나 자리를 펴고 드러누운 사람들이 가득한 것을 보고서 빨리 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타본 적은 없지만) 피난선이란 것이 이런 꼴이 아닐까 할 정도였습니다. 그 질서의식 뛰어난 일본인들이 여기저기 드러누운 모습을 보니 조금 이색적이더군요. 배 안에는 음료와 간식 자판기가 있으며,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는 곳도 있어서 배고프실 걱정은 안하셔도 됩니다. 야외로 개방된 흡연실도 있으며, 오락실도 있습니다. 배 안을 탐색하고, 책을 조금 읽다보니 뱃고동 소리가 우렁차게 들렸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배가 움직이더군요. 바다로 나가는 것입니다.

(야쿠시마로 가는 바다. 다섯 시간 동안 계속됩니다.)

 

 

바다

 이때부터의 다섯 시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커다란 쇳덩이에 올라 타서, 아직 가본 적이 없는 어떤 섬을 향해, 엄숙할 만큼 파란 바다를 가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의미를 묻는 질문 자체가 초라해지는 것은 아닐까요. 이걸 고독이라고 해야 할까요 동경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감탄이나 황홀 같은 단어를 써야 할까요. 저는 왠지 '정직'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바다가 주는 이 정직한 감각을 저는 너무나 좋아합니다. 가족, 친구, 학위, 직업, 통장 잔고와 임대차 계약서 같은 것은 저를 필요 이상으로 고평가하는가 하면, 또 어떤 때는 기대 이하로 저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바다를 마주하고 있으면 그냥 딱 저를 저인 만큼만 감각할 수 있다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살갗도 있고 팔다리도 있는 그런 인간. 이렇게 정직한 풍경을 앞에 두고 옆에 있는 다른 한 인간에게 사랑을 말하는 것은 얼마만큼의 용기를 요구할까요? 물론 전 고민할 필요가 없이 혼자였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외로움이라고 해도 제 작은 방 안에서 느끼는 것보다는 훨씬 명료한 것이었습니다. 명료하다면, 참을 만합니다. 이 육중한 배는 정직하게 자기를 밀었고, 저도 정직하게 혼자였습니다. 


('에메랄드빛'처럼 무슨 다른 것의 빛깔이 아니었습니다. 그야말로 정직한 파란 바다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섯 시간 입니다.)


(다섯 시간이라고요.)


(다섯... 야쿠시마가 보입니다.)


(천천히 항구로 들어갑니다. 누가 기다리는 매표소에 가기 위해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처럼 설렜습니다.)


(물론 저를 기다리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핫핫)



야쿠시마 (미야노우라)

 배에서 내리니 탁 트인 미야노우라 항구가 보였습니다. 날씨는 무척 맑았습니다. 가장 먼저 다네가시마로 가는 배를 알아봤습니다. 야쿠시마도 페리 터미널과 고속선 터미널이 따로 있는데, 저는 페리 터미널로 갔습니다. 야쿠시마와 다네가시마는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아서, 페리를 타도 1시간 5분이면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죠. 페리 터미널에 가서 창구 직원분께 여쭤보니, 다네가시마로 가는 페리는 '페리 타이요' 하나가 있고, 짝수일에는 오후 1시에, 홀수일에는 오전 9시에 출발한다고 하더군요. 저는 홀수일인 8월 13일에 간다고 하니, 그럼 오전 8시 30분쯤까지 와서 티켓을 사면 된다고, 예약은 필요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페리는 결국 타지 않게 됩니다. 나중에 다네가시마 편에서 적겠습니다.)

 페리 터미널을 나와 마을 쪽으로 걸었습니다. 항구를 벗어나자마자 인포메이션 센터가 있더군요. 일단 가봤습니다. 거기서 한국어로 된 야쿠시마 팜플렛과 영어로 된 지도, 버스 시간표 따위를 좀 챙겼습니다. 옆에서 다른 여행객들이 안내원과 하는 대화를 들으니 섬 안에 있는 모든 렌트카와 스쿠터 따위가 동이 난 것 같았습니다. 상당한 성수기에 왔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획득한 여행 정보지를 잠시 보는데 반가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성수기라서 버스 운행도 증편되어 있더군요. 저는 시라타니운스이쿄와 조몬스기를 하루에 볼 셈이었는데 가장 큰 고민이 시라타니운스이쿄 입구까지 오고 갈 이동수단이었거든요. 버스가 증편된 덕분에 무리없이 이동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인포메이션 센터를 나와 숙소까지 걷기로 했습니다. 날씨가 좀 더웠고, 짐이 무거웠지만 가능하면 천천히 야쿠시마의 첫 인상을 받고 싶었습니다. 야쿠시마는 생각보다 더 한적한 곳이었습니다. 제주도처럼 번화한 관광지를 생각하시면 안될 것 같습니다. 도로에 차도 거의 없고, 가게도 별로 없지만, 그마저도 문을 닫은 곳이 훨씬 많습니다. 그렇게 조금을 걸으니 바다로 들어가는 강이 나오고, 몇 채의 집과 낡은 돌다리가 어우러진 멋진 풍경이 나왔습니다. 

(대략 이런 느낌의 한적한 동네입니다.)


 특별할 것은 없었지만 이 한적하고 고즈넉한 인상이 굉장히 좋았습니다. '앗, 야쿠시마, 대박일 것 같아.'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달밤에 함께 당고를 나눠먹으며 산책을 하는 것은 어떨까요? 그러다가 조용하게 타들어가는 불꽃놀이를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앗 뜨거'하고 불꽃을 놓칠 때 걱정하는 척하면서 슬쩍 손을 잡는 것은? 아무리 더워도 망상은 할 수 있더군요. 일단은 계속 걸었습니다. 조금 걷다보니 A-COOP이라는 대형마트도 하나 나오고, '길을 잃은 건가'싶을 정도로 썰렁한 도로변도 걷고, 그러다가 '이거 걸어갈 만한 거리가 아니었네' 싶을 때쯤 제가 예약해 둔 숙소인 'Sen no i e'(이하 센노이에)가 나왔습니다.


센노이에

 결론부터 말하면 이 숙소는 '짱짱맨'입니다. 엄지손가락이 두 개밖에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이 숙소를 알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잠시 했을 정도입니다. 숨겨놓고서 나만 일 년에 한번씩 슬쩍 방문하고 싶은 그런 곳입니다. 

(센노이에의 입구.)


 제가 센노이에에 도착한 것은 오후 두 시쯤입니다. 너무 조용해서 사람이 있나 없나, 프론트는 어디인가 어슬렁하고 있으려니 직원 분이 나타나서 굉장히 반가운 얼굴로 '킴상'이냐고 묻더군요. 그렇다고 하니 어서 오시라며 프론트 기능을 하는 건물로 안내해줬습니다. 굉장히 고풍스러운 나무향이 가득 나더군요. 안에는 스페인어권에서 온 것 같은 커플이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잠시 위축되었지만 직원 분의 폭풍 친절에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일단 시원한 녹차와 특산품이라는 쿠키(약간 달달하면서 계피향 같은 것이 났는데 뭔지는 모르겠습니다.)를 제공해주셨습니다. 또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리고 '방이 아직 준비가 덜 되어서 네 시쯤 체크인이 가능할 것 같다, 하지만 짐은 맡아주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엥? 네 시? 약간 의아했지만 재촉은 소인배나 하는 거니까 별 생각없이 넘겼습니다. 

 센노이에는 삼십대 초반쯤으로 추정되는 젊은 부부가 거주하면서 운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부부라고 제 마음대로 착각했을 수도 있음.) 약간의 영어가 가능하지만, 언어 능력보다도 최선을 다해서 의사소통해오는 그 친절이 정말 굉장합니다. 아고다의 이용 후기에 'Incredible'하게 친절하다는 후기가 꽤 있었는데 무슨 뜻인지 대번에 알겠더군요. 

 일단 제게 오늘의 계획은 뭐냐며, 필요한 것은 없는지 물어왔습니다. 저는 오늘은 별 활동 없이 쉴 예정이며,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것은 내일 등산에 필요한 신발을 빌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직원 분들끼리 뭔가를 논의하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해줬습니다. 등산장비 렌탈샵인데, 이곳으로 절 픽업하러 올 거라고 합니다. 에? 신발 하나 빌리는데 픽업을 온다고요? 

 잠시 대기하니까 정말로 할아버지 한 분이 차를 몰고 왔습니다. 그의 차를 타고 근처에 있는 샵(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창고에 가까운)에 가서 이런 저런 등산화를 신어보고 잘 맞는 하나를 빌렸습니다. 2박 3일까지는 1,000엔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더 비쌀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흔쾌히 지불했습니다. 이게 야쿠시마 시세에 비추어 비싼지 아닌지는 생각도 안했습니다. 돈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저는 늘 주관적으로 판단하거든요. 가고시마에선 술 처먹는 데에도 5,000엔씩 태웠는데 등산화 2박 3일에 1,000엔이라니, 이걸 고민하는 거야말로 시간 '낭비'겠지요. 게다가 픽업 서비스까지 해준다니 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등산화 안 사오길 정말 잘했다 생각했습니다. 빌리고 난 뒤에는 다시 센노이에로 태워다주셨고, 반납은 그냥 센노이에에 하면 직접 찾아가신다고 했습니다. 아름답죠?

 센노이에로 돌아오니 또 궁금한 것은 없냐고 합니다. 내일 버스 시간표를 꺼내며 이게 맞는지 확인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시라타니운스이쿄로 가는 첫 버스가 오전 5시에 출발하는 것이 맞냐고 하니 또 여기저기 전화를 거셔서 확인하시더니 맞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정류장은 '우시토코 공원'이며, 그 정류장에는 5시 7분에 정차할 예정이라는 것도 알려주시더군요. 이렇게 쫄보인 저를 안심시켜 주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제가 가장 가까운 수영 스팟은 어디냐고 물었습니다. 센노이에 안에 있는 길을 통해 바로 옆에 있는 계곡으로 가도 되고, 아니면 계곡을 따라 조금 걸으면 더 넓은 강이 나온다고 하더군요. 그리고선 다른 직원 분까지 불러서 '무슨 바다는 어떨까?', '거기는 조금 멀지 않을까?' (물론 저의 추정) 이러면서 마구 논의를 하시더군요. 왠지 황송해져서 '그냥 여기로도 이이데쓰^^' 하니까 웃으면서 알겠다고 하시더군요. 자기는 조금 걸어서 강으로 가는 걸 추천한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방으로 안내해주셨습니다. 제가 얘기하지도 않았는데 '수영하시려면 옷을 갈아입으셔야 하니까 방으로 가시죠!' 하더군요.(물론 저의 추정) 네 시까지는 한 시간 이상 남았는데 체크인 할 수 있는거냐고 하니까, 파이널 체크를 해야겠지만 지금도 문제는 없다고 하시더군요. 

 센노이에는 모든 객실이 독채로 이루어진 일종의 펜션(?)입니다. 이런 숙박 형태를 일본에서는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저는 아담한 오두막 하나를 통째로 썼는데, 외부의 시선에서 자유롭게 나무로 잘 둘러싸여 있어서 굉장히 오붓한 느낌이었습니다. 방에 들어서니 역시 고풍스러운 나무향이 가득했고, 바닥에는 다다미가 깔려있었습니다. 제 짐이 잘 모셔져 있더군요. 먼지 한 톨 보이지 않았는데 대체 뭘 더 점검한다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원 분께선 방에 비치되어 있는 것들을 친절히 안내해주시고 '천천히 다녀오시라'며 떠났습니다. (목욕을 몇 시쯤 준비하면 될지도 묻더군요. 호오?)  

(대략 이런 느낌의 독채. 툇마루?도 있고, 검은 슬라이드 도어를 열면 창문입니다.) 


(안쪽에서 보면 이러한 느낌. 짐도 풀고 빨래도 널었더니 좀 너저분.) 


시라타니

 물놀이 옷으로 갈아입고 룰루랄라 걸었습니다. 센노이에에서 도보로 2~3분 정도면 시라타니강에 갈 수 있습니다. 야외 수영은 언제나 즐겁지만, 딱 좋은 스팟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짠물이냐 아니냐, 너무 얕거나 너무 깊은가, 파도나 물살이 너무 거세지는 않은가 이런 것들이 늘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늘 '그래. 수영 자체를 위해서는 실내수영장이 짱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라타니강은 상당히 적절한 수영 환경이었습니다. 강이니까 물도 안 짜고, 적당히 깊지만 빠져 죽을 정도는 아니고, 그러면서 햇살은 고스란히 느낄 수 있고, 사람도 없고, 더 이상 뭘 바랄까요. 특별히 절경은 아니지만 유유자적 헤엄치기에는 딱이었습니다.

(대략 이런 느낌. 얕아보이지만 어떤 부분은 꽤 도전적인 깊이였습니다.)


 일본인 가족이 한 두 그룹 있었지만 곧 떠나고 저는 이 물놀이 스팟을 고스란히 혼자서 차지했습니다. 물이 굉장히 맑아서, 물 속으로 들어가면 민물고기들이 손에 잡힐 듯이 보였습니다. 마음껏 헤엄을 쳤습니다. 헤엄을 치다가 그늘진 바위에 앉아서 과일과 무알콜 맥주를 먹는 것은 어떨까요.(음주 수영은 안됨.) 함께 하는 이의 젖은 머리 위에서 조각 조각으로 흩어지는 햇살을 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러다가 물에 풍덩 빠뜨리기도 하고, 나는 분명 물을 튀겼는데 역설적으로 불꽃이 일고... 강에서도 망상은 멈추지 않더군요. 물론 전 혼자였으니까 그냥 전지훈련 모드로 수영을 열심히 했습니다. 몸이 나른해질 때까지. 


다시 센노이에

 젖은 몸으로 길을 걸어 센노이에로 돌아왔습니다. 해가 적당히 누그러져서 기분 좋게 몸을 말릴 수 있었습니다. 센노이에 도착하니 6시쯤 된 것 같습니다. 씻을 차례입니다. 센노이에의 욕실은 독채와 분리되어 있는데, '고에몬부로'라는 일본의 전통 욕조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땔감을 부뚜막 같은 곳에 집어넣어 불을 피우고, 그 열로 가마솥 같은 것을 데우고, 그 가마솥에 사람이 들어가는 형태입니다. 가마솥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가 없네요. 아무튼 이 목욕을 준비하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물놀이 가기 전에 말해뒀던 터라 금방 이용할 수가 있었습니다. 

 아고다에 욕실은 공용이라고 되어있어서 여러 사람이 같이 이용하는 꼴인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닙니다. 딱 한 사람을 위한 욕실이 별채로 존재합니다. 정말 아담하더군요. 현대식 샤워기도 설치되어 있어서, 샤워를 하고 솥(?)에 들어갔습니다. 적당히 외부의 시선을 차단하되, 하늘을 볼 수 있는 창이 있어서, 솥에 몸을 담그고, 풀벌레들의 소리를 들으면서 피로를 좀 풀었습니다. 물이 뜨끈뜨끈합니다. 겨울이라면 정말 짱짱맨일 것 같습니다. 연인이랑 같이 오면 2인용 솥을 주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차피 지금은 해봤자 쓸쓸한 생각이니까 관뒀습니다.   

 욕실이 별채라는 점은 약간 불편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방 안에 꽤 큰 세면대가 있기 때문에 세수나 면도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만, 샤워는 할 수 없으니까요. 직원분께 여쭤봤더니 그냥 샤워만 하고 싶을 때는 이 별채를 언제든 이용하라고 하시면서 샤워기 온수 켜는 법을 알려주셨습니다. 방과 욕실은 불과 십여 미터 정도지만 어쨌든 옷을 다 벗고 왔다갔다 할 수는 없다는 것을 고려하셔야 합니다. 저야 뭐 밤 늦게 씻을 일이 없는 처지니까 큰 불편은 없었습니다. 

 목욕을 마치고 나오니 직원 분께서 '마트에 갈 거면 데려다주겠다'라고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저는 '매우 감사하다. 그런데 일단 ATM에 가서 돈을 뽑아야 할 것 같다' 라고 했습니다. 사실 제가 센노이에는 숙박비를 현금으로 현장 결제해야 한다는 것(이곳의 거의 유일한 단점)을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현금을 준비할 때 이걸 고려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먹고 마실 현금이 좀 아슬아슬한 상황이었습니다. 직원 분께선 '오늘은 공휴일이라 이미 문을 닫았을 것이다. 그리고 평소에도 6시면 닫는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카드를 이용할 수 있는 마트가 하나 있다. 그곳으로 데려다주겠다'라고 했습니다. 아니 원래 일본의 숙소에서는 이런 정신나간 친절을 베푸나요? 저는 기쁜 마음으로 그의 차를 타고 마트로 향했습니다. 걸어서는 약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곳이었습니다.(비교적 가까운 마트인 A-COOP은 카드가 안됩니다.)

 마트에 도착하자 그는 '나도 뭘 좀 살 테니 천천히 장을 보라'고 했습니다. 저는 마트를 돌며 식량과 주류를 쓸어 담기 시작했습니다. 야쿠시마를 떠날 때까지 먹고 마실 것을 충분히 샀습니다. 중간에도 제가 좀 헤매니까 센노이에의 직원 분께서 나타나 무엇을 찾냐며, 그건 저기에 있다며 도와줬습니다. 대체 이 분들은 어디까지 친절한 걸까요?   

 (저 회는 야쿠시마산입니다.)


 고독한 대식가답게 와구와구 잘도 먹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만난 웬만한 마트에서는 다 저렇게 소포장된 회를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다는 것이 굉장히 좋았습니다. 특히 야쿠시마에서는 야쿠시마에서 잡은 해산물을 팔고 있더군요. 저게 380엔입니다. 대체 5,000원도 안되는 돈에 1인분의 회를 살 수 있는 곳은 어디에 있나요? 만약 서울의 제 방 근처에서 저런 것을 살 수 있다면 저는 '가볍게 한 잔 하고 싶은데 치킨이나 족발을 시킬 순 없고...' 따위의 고민은 전혀 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센노이에의 방 안에는 전자렌지도 있고 커피포트도 있기 때문에 마트 음식을 편하게 조리할 수 있었습니다. 마트 음식일 뿐이지만 전날 가고시마에서 먹은 것 못지 않게 맛있게 먹었습니다. 

 센노이에에서 숙박을 하실 예정이시라면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먹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근처에는 식당 따위가 전혀 없습니다. 차를 렌트하셨다면 항구 쪽으로 나가서 먹을 곳이 있을 것도 같습니다만 확신은 못하겠습니다. 다만 센노이에에서는 일본식 바베큐(아마도 우리가 '풍로'라고 부르는 그것?) 설비를 대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경우에도 구워 먹을 식자재는 직접 마트에서 준비해야 한다고 하니,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아니면 저처럼 마트 음식을 사다가 드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것도 충분히 맛있습니다. 


 저렇게 먹고 마시고, <우미인초>도 좀 읽었습니다. 눕기 전에 잠시 방 밖으로 나와보았습니다. 센노이에는 야쿠시마에서도 읍내(?)가 아니라 산 밑자락에 있는 꼴이기 때문에 주변이 정말 깜깜하고 조용합니다. 하늘을 봤는데 별이 정말 엄청났습니다. 솔직히 그동안 별 같은 것에 감탄한 적이 없었습니다. 대학 시절 가평 같은 곳에 엠티를 가더라도 애들이 '우와 별 봐' 할 때 저는 심드렁한 편에 속했습니다. 그런데 이날 밤에 본 별들은 진짜였습니다. 별이 많았다기보다는 아예 다른 종류의 밤하늘이라고 말하는 게 더 맞을까요. 사진으로 남겨보려고 노력했지만 좀처럼 찍히지가 않았습니다. 지금 이 광경을 나 혼자만 본다는 것이 아까울 정도였습니다. 제 생각에 이것이 혼자하는 여행의 가장 큰 슬픔입니다. '지금 여기'를 오직 혼자서만 감각해야 한다는 것. 아무도 지금 이 느낌을 증언해줄 수 없다는 것. 황홀할수록 더 안타까워지는 역설입니다. 저렇게 별이 빛나는 하늘을 머리 위에 두고, 툇마루에서 모기향을 피워놓은 채 오랜 시간을 함께 한 부인과 맑은 술을 나누는 것은 어떨까요? 그건 제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순간에 가깝습니다. 물론 아직은 불가능합니다. '아직'이란 단어는 참 야속합니다. 

(1인분의 침구는 굉장히 깨끗하고 포근했습니다. 

내일은 5시에 나가서 12시간 동안 혼자 걸어야 하므로, 일찍 잠을 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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