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시마 혼자 여행 : (4) 야쿠시마 둘째 날
시라타니운스이쿄와 조몬스기를 하루에
여행 일정을 가늠할 때 가장 고민되는 부분이 야쿠시마에서의 2박 3일이었습니다. 저도 다른 여행자들처럼 시라타니운스이쿄와 조몬스기에 관심이 있었는데, 2박 3일이라는 짧은 일정 내에 어떻게 움직여야 저 둘을 즐길 수 있을지 생각했습니다. 섬에 들어가고 나가는 배편, 섬 안에서의 교통편, 해가 뜨고 지는 시각, 저의 체력과 등산 경험 뭐 이런 많은 것들 고려해야 해서 어려웠습니다.
일단 조몬스기 코스는 '안보'에서 출발하는 것이 보통이라 어려웠습니다. 제 숙소는 '미야노우라' 방면에 있기 때문이죠. 실제로 움직여보진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미야노우라에서 안보까지 자동차로 최소 30분 이상은 걸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른 아침에 안보까지 갈 때나 코스를 마치고 늦게 미야노우라로 돌아올 때 대중교통을 확보할 수 있을지 고민이었죠. 그리고 어떻게 성공한다고 해도, 그럼 시라타니운스이쿄는 언제 가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라타니운스이쿄는 미야노우라쪽에서 시작하는 것이 편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걸어서 접근할 수 있는 거리는 아니거든요. 조몬스기 코스만 10시간은 걸리기 때문에 가운데 날을 조몬스기에 쓰면, 시라타니운스이쿄는 섬에 들어온 날이나 나가는 날에 가야 하는데, 선박 시각을 고려하면 둘다 여의치 않아보였습니다.
둘중에 하나를 포기하는 것도 방법이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더군요. 그래서 확신은 없었지만 일단 둘을 하루에 본다는 생각으로 야쿠시마에 갔습니다. 시라타니운스이쿄 입구에서 출발, 시라타니운스이쿄를 뚫은 뒤에 조몬스기 코스에 올라타서 조몬스기를 보고, 다시 시라타니운스이쿄를 거쳐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았지요. 12시간 정도 걷는 것을 예상했습니다. 어차피 '읭 다리 아파, 잠깐만 쉬었다 가자' 라거나, '앙 저기 사슴 있어 사슴' 같은 말을 할 동행자도 없으니, '난 튼튼해! 난 하루만에 할 수 있어! '라는 객기를 부릴 수 있었죠. 이번 글은 저 둘을 하루에 볼 수 있는지, 가능은 하다고 쳐도 그것은 권할 만한 일인지, 이 의문에 대해 제 경험을 써보려고 합니다.
출발 전 준비
제가 숙박한 센노이에 앞에 있는 '우시토코 공원' 정류장에서 시라타니운스이쿄 입구까지 가는 첫 버스가 5시 7분에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12시간쯤 걸린다고 예상했을 때, 하산한 뒤 숙소로 돌아오는 버스를 타려면 이 시각에는 반드시 출발을 해야했습니다. 아래쪽에 버스 시간표를 보시면 제가 동그라미를 쳐놓은 두 군데가 보이실 것입니다. 오후 5시 10분에서 시라타니운스이쿄 입구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다시 센노이에로 돌아올 계획이었죠. ('※'표시가 되어있는 부분은 7/29~8/31, 9/17~9/24 동안만 운영하는 버스라고 써있죠. 제가 운좋게 이 때에 맞춰서 갔기 때문에 대중교통으로만 움직이면서도 시라타이운스이쿄와 조몬스기를 하루에 돌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 미야노우라 항과 시라타니운스이쿄를 오고가는 셔틀 버스의 시간표입니다.)
4시쯤 기상했습니다. 센노이에에서 준비해준 침구가 포근해서였는지, 몸이 무척 가벼웠습니다. 일단 어제 사둔 도시락과 컵라멘으로 아침을 든든히 먹었습니다. 산에서는 제대로된 식사를 하기가 어려울 테니까요. 그리고 샤워를 하러 집밖으로 나갔는데, 제가 쓰는 목욕 별채 앞에 불이 켜져 있더군요. 어제 직원 분과 대화하다가 '내일은 새벽에 나갈 거다' 라고 말했었는데, 깜깜해서 목욕탕을 못 찾을까봐 미리 붙을 켜두셨더라고요. 하, 이런 친절한 사람들 같으니.
씻었으니 짐을 쌀 차례입니다. 등산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에 약간 걱정도 됐습니다. 환경이 가혹하다기보다는 그저 장시간 걷는 코스기 때문에 짐을 최대한 줄여서 몸을 가볍게 하려고 했습니다. 제가 준비한 물품은 다음과 같습니다.
복장 : 상의는 반팔, 하의는 언더레이어에 반바지. 목장갑. (여분의 의복은 안 챙겼습니다.)
가방 : 집 앞 아울렛에서 10,000원에 사온 책가방.
신발 : 어제 빌린 등산화.
식량 : 빵 1, 에너지바 1, 소시지 1, 육포 1, 사과 1, 바나나 2.
음료 : 물 1L, 이온음료 500ML.
기타 : 수건, 헤어밴드 겸 마스크(?), 우비, 대일밴드, 랜턴, 안내 지도, 휴대 전화.
별 거 없습니다. 식량이 좀 신경쓰였는데 다른 여행기를 보니 도시락을 미리 주문해놨다가 새벽에 찾아서 가는 방법도 있더라고요. 더운 여름인데 빨리 상하지 않을까 걱정도 됐고, 땀을 질질 흘릴 것이 뻔한데 밥알도 잘 안넘어갈 것 같아서 저는 그냥 간식과 과일 위주로 챙겼습니다. (물론 어디서 어떻게 주문해야 할 지 잘 몰랐고, 주문하고 찾기가 귀찮기도 했음.) 어차피 한 끼 정도만 해결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실제로 식량은 충분했습니다. 랜턴은 해 뜨기 전에 입산할 것 같아서 챙겼는데 실제로는 필요 없었습니다. 해가 무척 빨리 뜨더라고요. 그리고 야쿠시마는 비가 무척 자주 온대서 우비도 괜찮은 것으로 챙겨갔는데 비가 안왔습니다. 다만 장갑과 수건은 꽤 요긴했습니다.
센노이에에서 시라타니운스이쿄 입구로
우시토코 공원 정류장에 나갔습니다. 정류장이라고는 해도 그냥 표지판 하나가 고철처럼 덜렁 서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기다리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여기로 정말 버스가 오나' 싶은 느낌이었죠. 아니나 다를까 5시 7분이 됐는데 버스가 안 오는 겁니다. 상당히 불안해졌습니다. 숙소로 돌아가 직원 분을 깨워서 물어봐야 하나 어쩌나 발을 동동하고 있으려니 버스가 5시 15분쯤 오더군요. 이번 일본 여행에서 교통편이 정시를 어긴 것은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버스는 등산객들로 가득했습니다. 대부분은 일본 분들로 보였습니다. 남 눈치 잘보는 한쿡 사람답게 나 혼자 이상한 복장을 하고 있지 않나 두리번두리번 했는데 다행히 별 차이 없더군요. 오히려 저보다 더 가벼운 느낌으로 온 분들도 많았습니다. 만석이었기 때문에 통로에 서서 가는데 버스가 굽이굽이 산길을 잘도 올라가더군요. 올라가는 중에 날은 점점 밝아오고, 시라타니운스이쿄 입구에는 5시 30분쯤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이 버스도 탈 때 번호표 뽑고 내릴 때 번호에 따른 금액을 내는 시스템이었던 것 같습니다. 대략 400~500엔 정도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시라타니운스이쿄 입구. 300엔의 협력금을 지불합니다.)
입구에는 안내소가 있는데 직원분은 안 계셨습니다. 서양 형님 두 분이 저에게 일본어로 '입구가 어딥니까?'라고 묻더라고요. 제가 영어로 '나도 여행자라서 잘 모르는데 여기 같다'라고 하니까 '근데 왜 아무도 없어, 돈 내야 되는 거 아냐?'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뭘 알겠습니까? 그냥 으쓱 했죠. 300엔을 내야 한다는 건 저도 알고 있었는데 돈 받는 분이 없으니 난감하더라고요. 입구에 가서 보니 돈을 넣는 통은 있었습니다. 그냥 자율적으로 넣는 건가 보다, 하고 300엔을 그냥 그 통에 넣었습니다. 이게 '입장료'라기 보다는 '협력금' 개념이라서 그럴까요? 아무튼 여러분 야쿠시마의 환경을 위하여 300엔을 냅시다.
(입구 옆에 있는 안내도. 한글도 있습니다.)
입구 옆에 시라타니운스이쿄의 전체적인 안내도가 있습니다. 대략 초록색 코스, 노란색 코스, 빨간 색 코스가 있습니다. 안내도에 '15번' 지점이 조몬스기 코스로 넘어가는 출구입니다. 일단은 최단 거리로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초록색 코스를 따라 15번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시라타니운스이쿄 : 초록색 코스
본격적으로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아직 6시도 안된 시각입니다. 이른 아침이라서 그런지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무슨 순례길처럼 '어떤 인파에 쓸려가는 듯한' 그런 등산이 아니라는 점이 매력적이었습니다. 차라리 외딴 숲을 그냥 혼자 헤매는 느낌입니다. 지금까지는 주절주절 여러 가지를 썼습니다만 오히려 지금부터는 쓸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저 걷고, 또 걷고, 또 걷습니다. 생각을 하면서도 걷고, 아무 생각 없이도 걷고, 두 발로도 걷고, 네 발로도 걷고, 뭐 그냥 걷습니다. 한 시간 반 비행기를 타고, 또 다섯 시간 동안 배를 타고 도착한 이곳에서 저는 무얼하고 있었을까요? 뭘하긴 뭘해요. 그냥 걷고 있었습니다. 산을 왜 오르냐는 질문에 혹자는 산이 거기에 있으니까 오른다고 대답했다지만, 거기 있다고 꼭 오를 필요는 없는 것인데 말이죠. 그런 식이라면 저도 늘 '거기'에 있습니다만 어째서 그녀들은 제게 오지 않고, 그녀들도 늘 '거기'에 있습니다만 저는 어째서 그녀들에게 가지 않을까요. 뭐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또 걷습니다.
(시라타니운스이쿄는 무척 녹색입니다. 녹색 속을 계속 걷습니다.)
(이런 식으로 이정표가 있어서 편합니다. 이정표 보고 계속 걷습니다.)
시라타니운스이쿄는 상당히 녹색이기 때문에 일단 건강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한편 군데군데에 큰 나무가 쓰러져 있거나, 혹은 그루터기만 남아 있는데, 저는 이쪽에 눈이 갔습니다. 아마도 이곳에서 목재를 얻던 과거의 흔적인 것 같아요. '죽은 나무들'이라고 생각하니 시라타니운스이쿄 전체가 어떤 고대의 전장(戰場)처럼 느껴졌습니다. 신과 요정의 시대에 나무 병사들이 참전한 어떤 거대한 전쟁이 있었고,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그 승리의 일부를 누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보았어요. 푸른 이끼의 생동감과, 나무의 시체가 주는 쓸쓸함이 묘하게 대비되는 공간이었습니다. <헬보이2:골든 아미>에서 엘리멘탈이 죽는 장면이 생각나더군요. 그는 아마도 숲의 정령인데, 그가 죽으면서 뉴욕 한복판의 건물과 거리를 녹색 이끼로 뒤덮는 환상적인 장면이 있거든요.
(이 나무는 살아있는 걸까요?)
타이코이와
제가 걸음이 빠른 편이긴 하지만 생각보다 금방 초록색 코스의 끝이 왔습니다. 초록색 코스의 끝에는 '타이코이와'라는 거대한 바위에 올라가 야쿠시마를 조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안내도에서는 16번이지요. 15번에서 조몬스기 코스로 바로 갈까, 16번을 들러서 타이코이와를 보고 갈까 살짝 고민했습니다. 타이코이와에 가려면 600미터 정도를 우회해야 하며, 상당히 험한 길을 올라야 하기 때문이죠. 그래도 가보고 싶어서 타이코이와에 가기 시작했습니다. 굉장히 좁고 가파른 길을 두 손을 써가며 오른 뒤, 타이코이와에 닿으니 들르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타이코이와에서 찍은 파노라마 사진. 실제로 보면 훨씬 멋집니다.)
가파른 길을 기어오르다 보면 갑자기 위 사진과 같은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굉장히 시원했습니다. 딱 가로세로 3미터나 되려나 싶은 바위에 올라 보는 것인데, 잠깐 헛디뎠다가는 바로 낭떠러지라서 후덜덜했습니다. 처음으로 '누가 내 사진을 찍어줬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여기 있었다는 것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을 정도로 멋지더라고요. 일본 청년 두 명이 있었는데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기 조금 쑥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그냥 포기했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이니까요.타이코이와에서 내려와서는 잠시 쉬면서 바나나를 먹었습니다. (왠지 바나나 사진은 찍어뒀더군요.)
조몬스기를 향해
15번 지점을 통과해서도 20~30분 정도를 걸으면 조몬스기 코스랑 겹쳐지는 쿠스가와 분기점이 나옵니다. 산길을 막 내려오다보니 갑자기 철길이 등장하더군요. 조몬스기 코스에는 이 목재운반용 철길을 따라 한참 걷는 길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반가웠습니다. 이때가 몇시쯤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8시가 안됐을 때입니다. 그러니까 시라타니운스이쿄를 뚫고, 타이코이와까지 보고 조몬스기 코스로 진입하는 데에 두 시간 정도가 걸린 셈입니다. 뭔가를 '주파'하듯이 움직였다는 것을 알아주세요. 만약 '조심해 여기 미끄러워'하면서 누구의 손도 잡아주고, '내가 물 떠올게, 잠깐 기다려' 뭐 이런 일을 했다면 시간이 좀 더 걸렸을 것입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이 있던데, 전 엄청 혼자라서 엄청 빨랐습니다.^-^
조몬스기 코스에는 사람들이 꽤 있었습니다. 여자도 남자도, 어린 아이도 어르신 분들도 고루고루 있더군요. 저도 그들중 하나입니다만, 왜 조몬스기를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을까요. 7200년 동안 거기에 서있었다는 이 나무가 우리의(저의) 인생을 어떻게 나아지게 할 수 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각자의 이유는 다르겠지만 저의 경우는 정직하게 말하자면 일단 '조몬스기 봤다.'라는 문장을 갖고 싶더군요. 그러니까 이건 어렸을 때에 하던 쓸데없는 놀이들, 예를 들어 '붉은 색 보도블럭만 밟고서 집에 가기' 같은 것의 조금 더 폼나는 버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목표 자체의 의미는 없지만, 그 과정을 완수하는 것이 즐거운 것입니다. 물론 조몬스기 자체가 무언가 감동을 주지 않을까 그런 기대도 있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7200년된 고목을 눈앞에 두는 순간, 그의 몸에 새겨진 계절의 흔적들에 눈물이 났습니다...' 라면서 여행기를 쓸 수 있겠죠. 하지만 과연 그런 일이 일어날까요? 나무야 나무인 것을.
아무튼 또 걷습니다. 조몬스기 코스는 시라타니운스이쿄보다 정비가 잘 되어 있습니다. 초반부는 왼쪽처럼 옛 철길을 따라 걷게 되어 있고, 후반부의 등산로도 상당히 많은 구간이 나무 계단으로 정비가 되어 있어서 걷는 것 자체는 편합니다. 험한 길은 별로 없었습니다. 드물긴 하지만 그냥 스니커즈를 신고 편하게 온 분들도 있더군요.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정비가 잘 되어 있다고는 해도 길이 좁아서 앞사람을 추월할 때나 맞은 편에서 오는 사람을 만나면 약간 불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역시나 일본분들은 참 예의가 몸에 배어 있더라고요. 앞사람의 속도에 맞추지 못하고 괜히 추월한 것은 이쪽인데, 추월 당한 쪽에서 '(제가 느려서) 실례' 라고 해버리니까요. 마주칠 때도 꼭 '먼저 가세요'라든지 '실례합니다'라든지 인사를 건네 주셨습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백 번은 넘게 말한 것 같습니다. 나중에 하산할 때는 다리가 아니라 입이 아플 정도였습니다.
조몬스기까지는 꽤 가야합니다. 그리고 이정표가 시라타니운스이쿄만큼 명시적이지 않기 때문에 약간 헷갈리는 때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다행인 것은 사람이 제법 있어서 따라 가기도 하고 물어보기도 하다보면 조몬스기에 도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몬스기로 가는 길에는 윌슨 그루터기를 비롯해서 유명한 삼나무들을 구경할 수 있는데, 나무나 숲의 생태에 관심이 많은 분이라면 상당히 즐거운 시간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슴들. <황조가>가 생각나네요. 훨훨 나는 저 꾀꼬리, 암수 서로 노니는데...)
조몬스기
'이쯤 되면 나올 때가 됐는데' 상태에서 한 시간쯤 더 걸으면 조몬스기가 나옵니다. 저는 제가 혹시 모르고 지나친 것은 아닐까 생각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조몬스기 근처에 가면 아래처럼 분명한 표지판이 나옵니다.
(조몬스기에 근접하면 나오는 표지판. 다왔습니다.)
직접 본 조몬스기는, 일단 '멀잖아!' 느낌이었습니다. 조몬스기 근처에는 관광객들이 편하게 볼 수 있도록 나무 데크가 설치되어 있는데, 나무 보호를 위해서인지 꽤 멀리 설치되어 있어서 조몬스기의 위엄을 느끼기가 조금 어려웠습니다. 아쉽게도 '7200년된 고목을 눈앞에 두는 순간, 눈물이...' 라는 여행기는 쓸 수가 없겠네요. 조몬스기 자체로부터는 그렇게 특별한 감정을 느낄 수는 없었습니다. 왠지 '이 정도 스케일의 나무, 미국이나 캐나다에는 많은 거 아닐까?' 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실망한 것은 아니고요, 그냥 딱 예상했던 만큼이었습니다. 원래 명소, 명물이란 것이 그렇잖아요. '우왓! 드디어!' 하고 마주 대하고 나면 한 5분쯤 뒤엔 '자 이제 그럼 뭐할까'라는 생각이 드는 거죠. 조몬스기가 무슨 죄겠습니까. 죄가 있다면 권태와 허무를 시시각각 느끼는 제가 죄죠.
조몬스기를 마주했을 때가 오전 10시쯤입니다. 시라타니운스이쿄 입구에서 조몬스기까지 4시간 걸렸습니다. 제 예상보다 한 시간 이상 빨리 도착한 셈입니다. 물론 저는 거의 쉬지 않고 내리 움직였습니다.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잠깐 잠깐 간식 먹듯 했기 때문에 더 빨리 도착했겠죠. 7200년된 나무 앞에서 인간과 세계에 대해 천천히 성찰하는 시간을 보내는 것도 멋지겠지만, 저는 몇 분 가량 나무를 멍하니 보다가 또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즐거움은 나무가 아니라 길에 있는 거 아니겠어요? 이제 목표는 달성했으니 길을 더 느긋하게 즐길 수 있겠지요.
조몬스기에서 멀어지며
제 생각에 제가 조금 일찍 조몬스기에 닿아서 일찍 돌아나온 편인 것 같아요. 돌아 나오는 길에 저랑 같은 방향으로 가는 사람은 거의 못 만났지만 반대 방향에서 올라오는 사람은 매우 많이 마주쳤거든요. 그래서 길을 계속 비켜줬던 기억이 납니다. 일본분들이 인사말을 너무 잘 하셔서 그다지 불편하다는 감정은 들지 않았습니다. 또 원래 하산하는 쪽에서 길을 비켜주는 거라고 어디서 주워들은 것 같기도 합니다.
조몬스기를 앞두고 식사를 하시는 분들도 많이 마주쳤습니다. 일본 분들은 역시 대부분 도시락을 드시더군요. 버너로 물을 끓여서 미소시루나 컵라멘을 곁들이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컵라멘 냄새가 정말 좋더라고요. 여기서 먹으면 뭔들 안 맛있을까요? 삼겹살을 굽거나 하는 것은 민폐겠지만 비교적 취사에 자유롭다는 느낌이니까 라면 정도는 얼마든지 끓여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단, 쓰레기통은 '전혀 없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니까 어떻게든 가방 속에 챙겨 나오셔야 합니다.
조몬스기에서 어느 정도 멀어지고 다시 시라타니운스이쿄로 향하는 길은 굉장히 멀게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멀었었나?' 싶기도 하고, '이게 내가 아까 왔던 길이 맞나?'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날이 완전히 밝아져서 그런지, 반대방향에서 봐서 그런지 많이 낯설었거든요. 사람도 거의 없어서 길을 잃은 것은 아닌지 약간 걱정도 됐습니다. 그러나 중간중간 기억이 날 만한 지점들이 있어서 다행히 제대로 갈 수 있었습니다. 슬슬 체력이 떨어지더군요. 이때에 바나나라든지 육포 같은 것을 먹었는데, 연료를 주입한 것처럼 금방 에너지로 전환되는 느낌이 들어서 재밌었습니다. 이때쯤 저는 거의 걷기 머신이었죠.
다시 시라타니운스이쿄 : 노란색 코스
다시 쿠스가와 분기점을 통해 시라타니운스이쿄로 들어섰습니다. 이때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이 안납니다. 아무 생각 안했던 것 같습니다. 발도 다리도 꽤 아팠지만, 기분은 좋았습니다. 육체를 마음껏 탕진하고 있다는 기쁨이었을까요. 어쩌면 '이렇게까지 걸을 수 있다니 꽤 튼튼하구나 핫핫' 같은 느낌이었는지도 모르겠네요. 갈 때보다는 확실히 시간이 더 걸리는 느낌이었지만, 어쨌든 다시 11번 지점까지 왔습니다. 11번 지점은 갈림길인데, 한쪽은 제가 아까 걸었던 초록색 코스, 한쪽은 안 가본 노란색 코스입니다. 노란색 코스가 두 배 정도 더 길어서 살짝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왔던 길로 다시 가기에는 조금 아까웠고, 시간도 많이 아껴 둔 상태였기 때문에 노란색 코스를 따라 가기로 했습니다.
(돌아갈 때는 아까와 달리 11번에서 9번을 경유해 6번으로 가는 노란색 코스를 걷기로 했습니다.)
이 노란색 코스를 선택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 잘한 일입니다. '빼어난 풍경'이라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독특한 감각을 제공하는 코스였어요. '숲'이라는 단어는 매우 흔한 단어고, 우리 모두 초등학교도 가기 전부터 '옛날 옛적 숲속에...' 로 시작하는 동화를 읽습니다. 그 '숲'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만난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기 저 나무 뒤에 잠자는 공주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물론 없었습니다.^^) 게다가 어째서인지 사람이 거의 없더군요. 수십 분을 아무도 마주치지 못하고 걸었을 정도로 한적했습니다.
(느긋하게 즐기고 싶어서 신발도 벗어놓고 쉬었습니다.)
(계곡물에 사과도 씻어먹었습니다.)
외딴 섬의 깊은 숲 속,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 사과를 먹는 기분은 특별했습니다. 오래 전 나쓰메 소세키는 'I Love You'를 '오늘 달이 참 밝네요'라고 번역했다는데, 만약 누군가 옆에 있었다면 괜히 '여기 물이 참 맑네요' 같은 소리를 지껄였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사과를 권하고, 사과를 오물거리는 입술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겠지요. 그러나 여기는 그녀도 없고, 친구도 없고, 심지어 타인조차 없었으므로, 저는 온전한 하나의 사과를 저 혼자 다 먹었습니다. 적어도 제 방에서 '히히히 다리 두 개는 다 내 꺼. 날개 두 개도 다 내 꺼' 하면서 치킨을 뜯는 것보다는 기분이 좋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무튼 이 노란색 코스는 정말 좋았습니다. 만약 시간상 시라타니운스이쿄와 조몬스기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전 시라타니운스이쿄를 권하고 싶어요. 특히 이 노란색 코스를요. (하지만 상징성 때문에 여러분도 어떻게든 조몬스기를 보고야 말겠죠? 저처럼-) 조금 덜 더울 때라면 책을 한 권 들고 가서 읽는 것도 좋을 것 같고요, 그러다 잠시 나무 둥치에 기대 깜빡 잠을 자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저는 아쉽게도 체험하지 못했지만, 비가 살짝 오거나 안개가 낀다면 정말 환상적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종료
다시 시라타니운스이쿄 입구로 돌아왔을 때가 오후 3시쯤이었습니다. 산행을 시작한 것이 오전 6시가 안됐을 때니, 왕복 9시간 정도가 소요된 셈입니다. 생각보다 별로 안 걸렸죠? 아무래도 안내도에 있는 예상 소요 시간은 다소 보수적으로 잡아 놓은 것 같아요. 중간에 밥을 지어 먹는다든지 뽀뽀를 한다든지 그런 걸 안하고 꾸준히 걷는다고 가정하면, 시라타니운스이쿄에서 출발해 조몬스기를 보고 다시 돌아오기까지 10시간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이걸 보면서 '우린 뽀뽀할 거니까 1시간 더 잡자'라고 말하는 커플이 없기를 바랍니다. 산에 존경심을 가져주세요.)
결론적으로 말해서 당신이 혼자라면 시라타니운스이쿄와 조몬스기를 하루에 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단, 어떻게든 이른 시간에 시라타니운스이쿄 입구까지 갈 교통편이 있어야겠죠. 저처럼 렌트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분이라면, 버스가 증편되는 시기에 가시는 것이 좋을 거예요. '지나가는 택시'란 것은 전혀 없으니, 미리 예약을 해야하는데 이것도 꽤나 귀찮고 게다가 값도 만만치 않은 것 같더라고요.
물론 일정이 3박 4일 이상이라면 굳이 무리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라면 3박 4일이라 하더라도 하루에 시라타니운스이쿄와 조몬스기를 다 보고, 다른 하루는 섬의 남쪽을 여행하겠어요. 이번 야쿠시마 여행에서 가장 아쉬운 것은 섬의 남쪽을 하나도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갈 날이 있기를 바랍니다.
다시 미야노우라로 : 우체국 ATM에서 현금 찾기
시라타니운스이쿄 입구에서 다시 미야노우라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습니다. 애매한 시간에 하산해버려서 약 한 시간을 기다릴 처지였는데, 성수기라서 증편된 버스가 곧 나타나더라고요. 땀에 너무 쩔어서 옆에 앉은 분에게 약간 미안할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무슨 정신인지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가서 소금기 때문에 흰 무늬가 장난 아니었습니다. 약간 쓰레기가 된 느낌으로 눈치를 보면서 꾸역꾸역 탔습니다.
숙소가 있는 우시토코 공원을 지나쳐서 미야노우라 읍내(?)까지 왔습니다. 우체국에 가서 돈을 뽑기 위해서지요. 일본 현금 카드를 갖고 계신 분이 아니라면 아마도 이 우체국이 미야노우라 방면에서 (어쩌면 야쿠시마 전체에서) 현금을 조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일 것 같습니다. 야쿠시마에는 세븐일레븐도 없거든요. ATM이 PIN번호를 물어서 약간 당황했지만, 한국에서 쓰던 비밀번호에 00을 붙이니까 인출이 되더군요. 어차피 제 돈을 제가 뽑은 거지만 갑자기 부자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현금 부족 때문에 맥주 한 캔도 계산을 해서 사야할 상황이었거든요.
돈을 뽑아서 센노이에로 다시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9시간을 넘게 걸었는데 (돈이 생겨서인가) 몸이 가볍더군요. 참고로 저는 처음부터 야쿠시마에서 렌트카를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운전이 미숙한 편이고, 특히 일본은 운전석 위치도 달라서 도저히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차까지 빌려서 어딜 그렇게 빨리 쏘다닐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해서 그냥 안 빌렸어요. 그리고 성수기라서 빌리려고 해도 차가 없었을 겁니다. 어쨌든 센노이에로 계속 걷다가 중간에 있는 A-COOP에서 장을 보았어요. 너무 거지꼴이라서 약간 눈치도 보였지만 현금도 생겼겠다 저녁에 먹을 것을 푸짐하게 샀습니다.
다시 센노이에
거지꼴로 다시 센노이에에 들어서니 직원 분께서 재미있었냐며 반갑게 맞아주셨습니다. 사실 아까 버스를 타고 숙소를 지나칠 때, 직원 분이 우연히 밖에 나와있다가 저를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막 흔드셨었거든요. 아까 버스 타고 가고 있는 절 봤다면서 ㅋㅋㅋ하시더라고요. 너무 팔을 격하게 흔드셔서 저는 저게 팔운동을 하고 있는 건지 제게 인사를 하는 건지 약간 헷갈렸는데 제게 인사를 했던 것으로 판명됐습니다.^^ 목욕 시간을 물으시길래 저녁 7시 30분쯤 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무슨 정신나간 생각인지 모르겠으나 또 시라타니 강에 수영을 하러 갔습니다. 지금의 이 노곤함을 안고 강물에 둥실둥실 떠 있으면 기분이 좋을 것 같더라고요. 산토리의 무알콜맥주인 올-프리 한 캔을 들고 (음주 수영 다메!) 쫄래쫄래 시라타니 강에 갔습니다. 아무도 없더라고요. 이쯤되니 나한테 무슨 자석이 있어서 척력으로 사람들을 밀어내나 뭐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또 신나게 수영을 했습니다. 하루종일 찌든 땀을 시원한 강물에 씻어내니 오래 전 광고처럼 '나는 자연인이다!' 라고 외치고 싶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하마터면 수영복을 벗어던질 뻔 했지만 교양인답게 잘 참고 바위에 널부러져서 올-프리를 마셨습니다. 무알콜 맥주치고는 꽤 맛있었습니다. 하긴 뭔들 안 맛있겠어요 이런 상황에.
하루 종일 산을 타고 또 수영을 했는데도 별로 피곤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스트레스가 없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우리 모두가 그러하듯 저도 꽤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몸뚱이를 사용하는 강도로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단 반나절의 근무로도 녹초가 될 때가 많거든요. 오늘은 정신적인 스트레스 없이 순수한 자유의지로 몸뚱이를 썼습니다. 이렇게 기분 좋게 체력을 탕진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센노이에로 돌아와 목욕을 했습니다. 전날과 달리 해가 다 졌고 그만큼 날씨도 선선해서 탕 속이 더 기분 좋았습니다. 혹사 당한 무릎이며 허리가 뜨끈뜨끈 해지는 느낌에 '크어ㅡ'라는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더군요. 목욕을 시원하게 했으니 이제 마실 차례입니다.
(이날 저녁 식사. 저 잔은 가고시마의 '사사쿠라'에서 받은 그것입니다. 원래 소주잔이지만...)
아까 A-COOP에서 사온 것들로 먹고 마셨습니다. 교자와 가라아게도 좋았지만, 저 회가 정말 맛있었습니다. 특히 우측 상단에 은색 껍질이 붙은 하얀 회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맛있더군요. 부드럽다기보다는 약간 '설컹설컹'하다는 말이 생각날 정도로 단단한 식감이었어요. 표현은 못하겠지만 정말 제가 먹어본 회중에 최고로 맛있었습니다. 나중에 가고시마의 야타이무라에 갔을 때, 요리사분께 이 회가 뭐냐고 사진을 보여드리며 여쭤봤는데 '사바'라고 하셨어요. 이 '사바'가 제가 아는 그 '고등어'가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고등어회는 초회만 먹어봤는데 그건 굉장히 부드러운 식감이었거든요. 초절임을 하기 전에는 저런 맛인 걸까요? 그렇다면 대체 초절임은 왜 하는 거죠? 저 회가 뭔지, 서울에서는 어느 가게에서 어느 계절에 먹을 수 있는지 아시는 분께서는 댓글 좀 달아주세요.
밤
먹고 마시고 책도 읽으며 밤이 깊었습니다. 흔히 '프랙털'이라고 부르는 어떤 기하학적인 구조처럼, 오늘 하루의 무늬 안에 삶 전체의 무늬가 새겨져 있는 것이라면, 이제 스스로 관 뚜껑을 닫아야 할 시간입니다. 오늘은 몇 개의 고개를 넘었고, 땀을 흘렸고, 사과를 먹었고, 물장구를 쳤고, 술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그것들 모두가 아무 대화도 없이 지나갔습니다. 센노이에에서 새로 준비해준 새하얀 이불이 어째서 수의처럼 보였을까요.
이불을 덮으니 시라타니운스이쿄며 조몬스기가 이미 과거가 되었다는 것이 실감났습니다. 내일 아침이면 센노이에도 야쿠시마도 다 과거가 된다는 생각을 하니 아쉬웠습니다. 게다가 '그래 거기서 그랬었지'라고 같이 추억을 나눌 사람도 없을 테니 더 아쉬웠습니다. '아쉬운데 더 마셔야지!'라고 같이 헛짓거리를 해볼 사람도 없으니 아쉬워도 도리가 없었습니다. 돌아가면 여행기라도 쓰자-라고 생각하다, 금방 잠들었습니다.